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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뮤니크 Aug 01. 2016

모르는 건 모른다고

이직한 회사에서 지하철 역까지는 정말 딱 한 갈래 길 밖엔 없다. 그래서 집에 가는 길이면 직장 동료들을 많이 마주치곤 하는데 다행인지 불행인지 안면인식장애가 심한지라 실제로 내가 알아보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일주일 전, 그날도 매일 들고 다니는 에코백을 어깨에 메고 귀에는 이어폰을 꽂고 퇴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서 나처럼 이어폰을 꽂고 가는 어떤 분을 보는 데 이상하게 낯이 익었다.


인사를 했다.


나 : 안녕하세요
그분 : (머뭇거리며) 아, 네... 안녕하세요. 누구신가 했어요.
나 : ㅎㅎㅎ


누군지는 잘 모르겠으나 낯이 익은 걸 봐서 어디선가 봤겠거니 하고 생각하다 보니 직원 연수 때 탔던 큰 관광버스의 옆자리에 앉으셨던 분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분이겠거니 하고 얘기를 주고받고 있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순간 고민했다. 누구시냐고 물어봐야 되나? 혹시 기억 못 한다고 기분 상해하진 않을까?


그때 생각나는 한 장면.


이직한 지 4일 만에 1박 2일로 참여하게 된 직원 연수. 그때 우리 기관의 홍보대사였던 모 연예인의 토크콘서트에서였다. 연예계 마당발로도 유명한 그에게 직원들 중 한 명이 물었다. 질문의 내용은 이랬다. 사회복지사이신 그분은 사람들 이름을 잘 기억하지 못해서 고민이라며, 사람들이 먼저 아는 척을 해도 그분께서는 기억 못 해서 고민이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휴대폰에 만나는 사람의 인상착의나 만났던 날이 어땠는지 구체적으로 적어보라고. 그리고도 만났을 때 상대방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을 땐 솔직하게 나는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데 당신과 만났던 기억이 좋은 기억이었던 것 같다고, 다시 한 번 말씀해달라고 말이다.


나는 그의 말을 떠올리며 솔직하게 말했다.


나 : 그런데 죄송한데 제가 잘 기억이 안 나서.... 혹시 어느 부서에서 일하셨죠?
그분 : 아 ㅎㅎㅎ 저는 00분석팀에서 일해요~


우리 기관은 팀 별 팀원의 수가 적은 편이라 나중에 조직도를 보고 이 분이 어떤 분인지 충분히 찾아볼 수 있었기에 나는 더 자세히 묻지 않았다. 그분을 기억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어느 부서에서 일하시는지를 기억하지 못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다행이라고도 생각했다.


알고 보니 내가 잘 알아보지 못했던 그분은 00분석팀의 팀장님이었는데, 00분석팀은 내가 제일 우리 기관에서 제일 궁금해하던 팀이기도 했다. 특히 내가 전전 회사에 다닐 때 끝내 마스터하지 못했던 바로 그것! OLAP을 다루는 팀이었다. 자연스럽게 얘기를 하다 보니 하반기에 OLAP 교육이 있을 거란 정보도 얻을 수 있었다. 솔직하게 얘기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아는 척하고 넘어갔다면 나는 그분이 어느 팀에서 일하는지 몰랐을 테니까.

 



최근 며칠 마음이 힘들었다. 내가 맡고 있는 업무 중에서는 영어를 잘해야 할 수 있는 업무가 있다. 입사 직후에는 단순히 내 영어 실력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원어민 수준의 영어 실력이 있어야 만족할 만한 퀄리티를 만들 수 있는 일이었다. 당연히 내 능력은 그에 미치지 못해 일을 더디게 처리할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같은 팀에 영어를 잘 하시는 분이 있어서 검수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검수를 마치고 돌아온 문서는 거의 새로 썼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의미나 뉘앙스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정말 창피했고 자존심도 상했지만 그래도 그 업무를 제대로 못하는 것보단 나으니 마음이 조금 상해도 어쩔 수 없었다.


내 마음이 상했던 이유는 그 업무를 하는데 내가 최근 일주일 동안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였기 때문이었다.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선까지 한 후에 솔직하게 말씀드리고 도움을 요청했으면 빨리 끝났을 일을 그래도 자존심 때문에 단어 하나라도 더 고치고, 문장 하나라도 다시 표현하다 보니 시간이 늦어졌는데 문제는 그렇게 손 본 문서도 엉망이었다는 것이다.


모르면 모른다고 말하는 것도 능력이다. 물론 나 스스로 그 업무를 완벽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줄 알고, 필요하다면 도움을 요청하는 것도 필요하다. 왜냐하면 세상엔 완벽한 사람이 없고, 그렇기에 회사라는 조직은 여러 사람들로 구성되어 있을 테니까. 모르는 건 모른다고 말하자.


+) 이렇게 심각한 안면인식장애가 있는 나는 사람들을 인상착의로 기억하기 때문에 옷이나 신발, 가방 등을 기가 막히게 기억하는 편이다. 그렇기에 나의 첫 직장에서의 업무는 계속 패션 관련 일이었고, 어느 정도는 그 일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개인의 환경은 직업에도 영향을 미친다.


+) 그리고 내가 낯이 익다고 생각했던 그 팀장님은 생각해보니 전전 직장에서 같이 일했던 협력사원을 닮아서 낯이 익었던 것 같았다... 정말이지 얼굴 구분을 잘 하고 싶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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