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점 없는 하루

“오늘도 무언가 해내지 못했다면 숫자라는 무게가 무거웠던 걸지도 몰라요.

by 묻잎

오늘도 그는 일찍 눈을 떴어요.
알람보다 12분 빨랐고, 어제는 6시간 18분을 잤어요. 평균보다 42분 부족했죠.


눈을 뜨고 일어나는 데 3분, 세수 2분 21초, 양치 1분 14초.
아침은 샌드위치 하나. 총 397kcal. 탄수화물 42g, 단백질 16g, 지방 18g.


지하철에서 본 광고는 23개. 그중 5개는 자격증, 7개는 스펙.
유튜브 숏츠는 14개. 인스타 피드는 26개.


“하루 10가지 목표는 기본입니다.”
“5시에 기상하지 않으면 성공은 없습니다.”
“이건 당신이 게을러서 그래요.”
“이래서 당신은 안 되는 거예요.”
“ㄹㅇ 노력 부족;;”


화면 속 문장들이 자꾸만 따라왔어요.
넘겼다고 생각했지만,
마음에 말풍선처럼 붙어버린 문장들이 있었죠.


회사에 도착하자 수치로 잘린 업무표가 열렸어요.
10시 회의, 11시 보고서, 12시 메일 답변,
2시 피드백 정리, 3시 회의, 4시 업무 리뷰, 5시 정리.


그가 말한 횟수, 쓴 글자 수, 응답 시간, 모두 수치로 기록됐어요.

“회의 발언 3회. 낮습니다.”
“생산성 지수 78.4. 평균보다 5.3 낮습니다.”
“이번 달 성장률 목표의 83%입니다.”


점심시간은 12분 대기, 18분 식사, 10분 산책.
그는 식판을 내려놓으며, 자기 자신도 숫자로 나뉜 느낌이 들었어요.
하루를 살아가는 게 아니라,
하루를 채점받고 있는 기분이었죠.


그리고 쉴 틈도 없이 SNS를 켰을 때—
좋아요 3개, 댓글 0개, 조회수 28회.


피드에는 익숙한 말이 또 반복됐어요.

“당신이 아직 부족한 이유는…”
“1일 1루틴, 3번의 실천, 21일 반복.”
“이건 당신이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에요.”


그는 어느 순간, 숨이 턱 막혔어요.
손에서 휴대폰을 놓지도 못한 채,
뭔가 안에서 조여왔어요.


‘내가 정말… 열심히 안 했던 걸까?’
‘나는 왜 이렇게 지칠까…’


그때였어요.
조용한 소리 하나.


툭.

묻잎일이, 화면 위에 작은 발끝을 내밀었어요.
“어… 여기, 너무 많이 붙었어요. 숫자들요. 이건, 좀… 무거워요.”


묻잎삼은 말없이 뒤뚱뒤뚱 걸어왔고,
손바닥만 한 파도 지우개를 꺼냈어요.
쓱— 하얀 물결처럼 숫자 하나를 지웠어요.


묻잎이는 작게 휘파람을 불며 낚싯대를 드리웠어요.
“게으르다… 부족… 이건 다 낚아야 해요.”
자막처럼 붙은 말풍선들을 하나씩 끌어올리더니 툭툭 털어냈어요.


묻잎사는 조용히 그의 어깨 위에 앉았어요.
손수건 같은 걸 펴고 화면을 살짝 덮었어요.
“이건 안 봐도 되는 날이에요.”


그는 손끝을 멈추고, 휴대폰을 내려놓았어요.


그 순간, 모든 숫자가 사라진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어요.


그리고 다음날, 똑같은 하루가 다시 시작됐어요.


그는 눈을 떴고, 빛이 창가에 머물렀어요.
거울 앞에서 얼굴을 씻을 땐 물이 따뜻했어요.


아침은 식빵 한 조각과 커피.
버스 창밖으로 사람들이 지나갔고, 광고도 있었지만
그는 그냥 바라봤어요.
눈이 머무는 대로, 마음도 따라갔어요.


회사에 도착해 노트를 펼쳤고,
손끝으로 펜을 돌리다 멍하니 창밖 하늘을 바라봤어요.
조금 뒤, 조용히 글자를 하나씩 써 내려갔어요.


점심시간엔 따뜻한 햇볕이 드는 자리에 앉아
작게 숨을 쉬며, 잠시 눈을 감았어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그는 오늘 하루가
조금, 살아지는 것 같았어요.


묻잎일은 손바닥에 햇살을 받아보고,
묻잎이는 주머니에 낚싯대를 말아 넣고,
묻잎삼은 가방에 지우개를 고이 넣었고,
묻잎사는 조용히 그의 곁에 앉아 등을 기댔어요.


묻잎이들은,
오늘 하루의 무게를 조용히 걷어내듯
그의 곁에 천천히 걸어갔어요.


그날 밤,
그는 아무것도 기록하지 않았어요.


그건, 처음으로
채점 없는 하루였거든요.


하지만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그 하루가
마음에는 가장 오래 남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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