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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밥 Jan 26. 2024

놀고먹는 처지가 되어서야

찰나와 놀기



반성이란  해봅니다.










비밥.




영겁의 시간 같던 젊은 은 찰나와 같이 지금이 되었고,

허영과 거짓 등으로 휘발되어 나를 찾을 수도 없다.


한마디로, 정신 좀 때다.








프리랜서 8개월, 직장인 8년, 자영업자 8년, 그리고 어쩌다 보니 백수 8개월 차에 접어들었다.


심심하게 살아온 소인배. 기깔나게 올라선 제1의 전성기도 멋들어지게 그어 본 삶의 그래프도 없다. 떠밀리듯 공부하고 체념한 채 군에 가고 낙하산 주제에 퇴근질만 일삼다가 기대 반 무모 반에 장사 길로 돌아섰다. 운 좋게 대박이 났고 보기 좋게 말아먹었다. 갖은 변명에 딸 용돈은 오래됐고 아내와의 대화들은 일상적이지만 늘 긴장감이 숨어 있다.


막연한 기대감에 오늘을 접지만 아침이면 날카로운 현실을 펼쳐야 한다. 돈을 벌어야 하는데..

흐르는 시간은 사치 낭비하듯 퍼내고 있다. 실패에 대한 불안함으로 미루고는 있으나 환영받지 못할 무책임한 태도임을 안다. 덜컹 아무거나 시작할  수 없다는 자기 합리화 같은 동기를 두르고 이유 있는 쪽잠으로 사치를 누린 채 지금에 누워버렸다. 미적거리는 나를 탓하며 얻은 거라곤 뻔뻔한 자격지심 그리고 자각은 하고 있으나 의지마저 지워버리고 있는 게으른 나를 발견하는 일뿐이다.


부동의 일상은 부산한 생각을 만들어낸다. 몸이 고되야 생각이 줄어들거늘 멈춘 일상에도 매너리즘은 있나 보다. 잡다한 고민이 한상이지만 씹어 넘기지 못하고 상해 가고 쌓여간다. 어쩜 안주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 시간이 길어질수록 점점 나를 폄하하게 된다. 쉬면서 다음을 계획하는 여유를 시작으로 옹졸한 상황 탓만 일삼으며 궁색한 변명 해대더니 결국 웃기고 자빠진 주제에 놀고 앉아있는 모습이다. 나름 잘 살아온 건 아닐까 위로만 해대는 나에게 진절머리가 나면서도 온전히 스스로 비판하지 못한다. 내 안의 초라함이 커질수록 떨어진 자존감은 정답을 밀어내고 있으니.


그간 잘 살아온 걸까.

아님, 잘 지나쳐버린 걸까.


의미 없는 질문에 내다볼 앞날이 가려진다.




비밥.

 








그럭저럭 잘 살아왔느냐 스스로 반문해 본다면, 아니 그럴 리 없다.

욕심 많고 눈치 없고 바라는 건 가득이며 있어 보이고 싶어 하는 거짓으로 일관했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꽉 막힌 삶을 산 것 같다. (이제라도 알게 된 게 무척 다행이다..) 매몰차게 나를 타박하고 싶지만 그럼에도 온전히 미워할 수 없는 건 나도 나름의 페이소스를 가지고 있을 거라는 자기 방어적 기질이 있기 때문이다. 때론 그게 구역질 나게 밉기도 또 때로는 무던히도 안쓰럽게 느껴지기에 냉정한 자기 성찰은 여전히 온데간데없이 날아가버리기 일쑤다.




비밥.








짚어 보자면.



#. 그간 사회생활을 해오며 남아있는 주변인이 없다. 내 탓인데 그들에게서 이유를 찾으려 애썼다. 비겁한 자기 방어. 참 많이도 어질르고 다녔기에 살갑게 비벼주는 사람이 없다. 친구가 보고 싶고 사람이 그리워도 관계는 회복되지 않음을 안다. 늘 도망으로 해결하는 습관이 안겨 준 벌이다. 과거를 떠올리며 스스로 힐난하지만 불편한 기억 역시 부딪히며 풀어야 하는데 그러기에 난 인간관계에서 너무 숨어댔다. 


어릴 때 교회 크리스마스 공연을 하게 된 적이 있다. 사람들 앞에 선다는 설렘도 있었으나 뭔지 모를 두려움도 분명히 존재했던, 돌아보면 항상 또렷하게 떠오르는 내적 갈등이 심어진 첫 순간이다. 그리고 내적갈등 어쩌고라고 말하기엔 당차게 시작하여 뻔뻔하게 도망가버린. 무대에 세워 주시려던 아동부 선생님의 가슴 언저리에 씁쓸한 배신만을 안겨 준 베드로. 아니, 유다로 남아 있을 허무한 사건이다. 가끔 잠들기 전이면 찾아오는 돌이키고 싶은 순간이지만, 도망의 습관은 이날부로 시작되어 많은 것들이 떠났고 오지 않았다. 부끄러울 뿐.





#. 나만 쏙 빠진 채 안 좋았던 느낌만을 감정으로 남겨두고 관계에 선을 그어버린 왜곡된 기억이 너무 많다.


예전에 친구와 술자리를 갖던 중 서로의 안부를 묻다 최근 관둔 직장 얘기가 나온 적이 있다. 당시 나는 방송아카데미를 수료하고 지방 방송국의 구성작가로 있다 그만둔 상태였는데, 다른 곳에서 경력을 좀 더 쌓다 서울로 가고 싶다는 얘기 정도였다. 그리고 그 친구는 자기 누나도 지방 방송국 작가로 일했었는데 정규직도 아닌 데다 월급은 몇 십만 원 남짓이라는 둥 나로선 듣기 거북한 느낌의 말들만 쏟아냈었다. 왠지 비꼬는 느낌이 들었고 불편한 감정이 생겨 한동안 연락하지 않았다. 근데 최근 들어 천천히  보니, 꼴에 방송국 작가로 성공할 거라는 알량한 자랑질을 해대는 잊혔던 내가 보이기 시작했다. 마치 뭐라도 된 것처럼 뭐라도 될 것처럼 주절대는 낯짝이 얼마나 보기 싫었을지. 다른 친구들을 대신해 쏟아낸 말들이 얼마나 꼬숩고 시원했을지. 내가 채워지고 나니 이제야 그날의 대화가 온전히 보이기 시작했다. 왜곡된 기억 중 많은 부분이 나를 빼버린 채 앞뒤로 완성돼 있고 불만 섞인 기억의 여러 공간을 채우고 있어 왔다. 따져보면 나로 인한 조건 반사임에도 감정만을 실은 무조건 반사로 의식하고 행동했던 것들. 너무 많다. 눈치 없는 삐딱함만 갖고 살아왔다. 역시 부끄러울 뿐.


#. 최고를 꼽으라면 아내를 만나 결혼한 것. 나로 인해 극악의 삶을 살아내고 있다.





이런 식으로 얘기하자면 혼자 있어도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부끄럼으로 끝나지 않는다. 놀고먹는 일상의 주는 생각이고 그 생각의 주는 나를 돌아보는 것이 되어가고 있다. 앞을 준비해도 부족할 시간을 낭비한다는 생각마저 든다. 불안함이 주는 자기반성일 수도 위축되어 가는 자기 비하일수도 있지만 흘려버리기엔 곱씹는 시간이 아깝지 않은 것 같다. 반성 없이 살아왔음을 반성하는 게 어쩌면 지금의 나에게 가장 필요한 준비물이고 다음을 계획하는 마중물이 되어줄지도 모른다. 눈치 보지 말고 눈치껏 반성하고 돌아보자. 정신 차리고 준비할 수 있도록.


내가 지나온 삶의 길은 앞으로 나아갈 삶의 표본이 되는 거니까.




비밥.




그간 잘 살아왔든 잘 지나쳐왔든

내가 지나 온 길이다.

잘 살펴야 나아갈 수 있다.






김수철 아저씨가 이런 노래를 부르셨다.

"모르겠네 정말 난 모르겠어 도대체 무슨 생각하는지"로 시작해

"말로만 그래놓고 또 또 또다시 그러면 어떡하니"라고 하다가

"여보게 정신 차려 이 친구야"로 끝나는.


지금 필요한 명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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