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자살 사건

by 머쓱


눈사람 자살사건 / 최승호

그날 눈사람은 텅 빈 욕조 위에 누워있었다
그는 뜨거운 물을 틀기 전에 더 살아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 곰곰히 생각해 보았다
더 살아야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사는 이유 또한 될 수 없었다
죽어야 할 이유도 없었고 더 살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아무런 이유 없이 텅 빈 욕조 속에 누워 있을 때 뜨거운 물과 찬 물 중에서 어떤 물을 틀어야 하는 것일까
눈사람은 그 결과는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뜨거운 물에는 빨리 녹고 찬 물에는 좀 천천히 녹겠지만
녹아 사라진다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나는 따뜻한 물에 녹고 싶다 오랫동안
너무 춥게만 살지 않았는가
눈사람은 온수를 틀고 자신의 몸이 점점 녹아 물이 되는 것을 지켜보다 잠이 들었다
욕조에서는 무럭무럭 김이 피어올랐다

- 우화집 <눈사람 자살사건>, 달아실, 2019






죽는 날에 대해 종종 생각한다. 소정에게 나의 묘비명을 미리 말해 두었고, 묘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그 글귀는 아마 납골당에 나의 자리 앞에 쓰일 것이다. 나는 안락사로 생을 마감할 것이다. 그리고 그때에는 조촐한 파티를 열 것이다. 서른 살에 이루고 싶은 꿈은 서재를 갖는 것이고, 마흔 살에 이루고 싶은 꿈은 친구와 함께 사는 것이다. 쉰 살에 어떤 모습일지는 아직 구체적으로 생각하지 못했지만, 생의 마지막 모습은 생각했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 그리고 나를 좋아한다고 확신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불러서 파티를 할 것이다. 맘마미아의 결혼식 같은 분위기라면 좋겠다. 그리고 어느 정도 흥이 오르면 시를 낭송할 것이다. 내가 그날의 주인공이랍시고 허튼소리 하지 않도록 미리 딱 하나의 시만 읊겠다고 이야기해 놓을 것이다. 그 시는 이것으로 해야겠다(‘시’라고 말하겠지만, 사실 최승호의 「눈사람 자살사건」 은 우화집에 있는 우화다).


제목은 읊지 않을 것이다. 처음 이 우화를 읽었을 때 너무 좋은데 마음에 계속 걸리는 것이 제목이었다. 때로는 아무것도 아닌 말 한마디, 혹은 한 단어라도, 그것이 듣는 사람의 마음에는 비수가 될 수도 있다. '자살'이라는 단어에 들어가 있는 수많은 사회적인 의미들을 생각하면,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의 마지막 편지로 이 우화의 제목을 읽어주는 것은 잔인할 것 같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줄 것 같다. 그래서 나는 제목을 읽지 않을 것이다. 눈사람은 그저 따뜻해지고 싶었던 것이다. 그렇게 파티에 온 사람들에게 말해주고 싶다.


이후로 나는 ‘나의 마지막 파티’에 대해 많이 생각했다. 웨딩 플래너처럼 야외에서 할지, 실내에서 할지 생각했고, 점심때가 좋을지 아니면 술을 왕창 마실 수 있게 저녁때가 좋을지 생각했다. 그런데 또, 술을 왕창 마시면 내가 사람들을 다 버리고 집으로 돌아갈 것 같아서 점심이 좋을 것 같았다(만취해서 사람들 몰래 집으로 간 전적이 몇 번 있다). 그래도 나의 친구들에게 술이 빠질 수는 없으니 맛있는 술을 준비해서 점심부터 원하는 만큼 마시게 해 줄 것이다. 이렇게 마지막을 생각하며 결국 술 생각만 해버렸다. 그러다 정신을 붙잡고 이성적으로 계산하기 시작했다. 며칠 전에 트위터에서 이런 글을 읽었다.


안락사를 하는 데에는 2천만 원이 든다.


2천만 원이라니? 나에게 그 만한 돈이 있을 턱이 없다. 게다가 내가 생각하는 파티 비용까지 합치면… 거의 3천만 원이 필요하다. 아니, 안락사를 하고 싶어도 돈이 없어서 할 수 없다는 말이야? 이건 너무 억울하다. 나는 연탄가스를 마시고 싶지도 않고, 목을 매달고 싶지도 않다. 나는 나의 삶을 부정할 생각은 없다. 나의 죽음을 받아들이고 싶은 것일 뿐이다. 준비하고 싶다. 끝까지 즐겁고 싶다. 일찍 죽고 싶다는 것도 아니고, 그저 우리가 고등학교 1학년 즈음 ‘희망하는 대학’ 칸에 모두 성균관대(당시 나의 친구들 사이에서는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이 인기를 끌어서 성균관대가 인기였다)를 쓰는 것과 같이, 나의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그런데 성균관대를 썼던 친구들의 반 이상이 현실적인 문제(예를 들면, 내신 점수)에 부딪쳐서 다른 대학에 진학했던 것처럼, 내가 돈이 없어서 나의 미래를 타협해야 한다는 것인가? 나는 통장에 400만 원을 넣어서 로마에 왔고, 로마에서 생활한 지 반년이 지난 지금 나에겐 100만 원이 남았다. 어디로 갔는지는 모르겠다. 그리고 나는 YES24 북클럽 정기 회원만으로도 모자라서, 지난주에 밀리의 서재 정기 회원권도 결제했다. 또, 어제는 넷플릭스가 모자라서, 유튜브 프리미엄을 결제했다. 나의 소비 습관을 보여주는 일례다. 그냥 막, 막, 아주 막 쓴다.


그리하여 결국 나의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중간 목표는 3천만 원 모으기가 되었다. 아, 안 될 것 같다. 아무리 생각해도 3천만 원은 무리일 것 같으니까, 파티 규모를 줄여서 2천5백만 원으로 하자. 앞으로 친구가 더 늘어날 것 같지는 않아서 다행이다.


얼마 전, 이전부터 알고 지내던 한 언니를 만났다. 지금 독일에 살고 있어서 그냥 독일 언니라고 부르겠다. 독일 언니와는 대학교 때 연극 동아리를 같이 했었고, 마지막으로 같이 연극을 한 후에 거의 5년 만에 만났다. 저녁을 같이 먹고 아이리쉬 펍에 갔다. 독일에서 온 독일 언니, 그리고 로마에서 가이드를 하고 있는 내가 ‘아이리쉬’ 펍에서 '기네스' 맥주를 마시며 각자가 겪은 인종차별을 나누며 분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들을 나열했다. 그 끝에, 나는 내가 그때 당시 몰두하고 있던 나의 마지막 파티에 대해 털어놓았다.


독일 언니는 나의 계획을 들으며, “그럼 너의 부모님은 어떻게 해?”라고 물었다.


음, 그 생각은 해본 적이 없다. 난 내가 안락사를 택할 때 즈음이 되면, 당연히 부모님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현대 과학의 발달 수준으로는 감히 그렇게 예상할 수는 없다. 나의 부모님은 과학의 힘을 이용해서 200세까지도 살고 싶어 할 수 있다. 그건 또 걱정이다. 부모님을 파티에 초대해도 될까? 초대하지 않으면 서운하지 않을까? 그렇다고 초대하기에는 유교 사상이 어릴 때부터 뇌에 자리 잡아서 그런지 불효를 하는 것 같다. 내가 이런 고민을 하고 있으니 독일 언니가 말했다.


“야, 됐어. 그만해. 아니 5년 만에 만나서 너의 장례식에 부모님 초대할지 말지 듣고 싶지 않아. 너무 무거워. 부담스러워.”


맞는 말이다. 사실 파티(독일 언니의 표현을 빌리면, 장례식)를 열 때 제일 고민되는 게 누구를 초대할지 결정하는 것이다. 어려운 결정은 나중으로 미루자. 그리고 일단 나는 파티 BGM을 선곡하기로 했다. 앞으로 좋은 노래를 듣게 된다면, 파티 플레이리스트에 보관할 것이다. 일단, 어제 '(여자) 아이들'의 LION을 넣었다.





800px-Gentileschi_judith1.jpg 유디트와 하녀, Artemisia Gentileschi, 1613-1614,



여기까지가 미리 썼던 글의 초고다. 며칠 뒤에 한 번 더 읽으며 마지막 수정을 한 뒤에 글을 올리려고 했다.


그런데 최근에 있었던 한 사건이 이 글을 올리지 못하게 했다. 그 사건 이후「눈사람 자살사건」을 다시 읽으면서 슬퍼졌다. 죽음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너무나 무거워졌다. 하지만 나의 장례식에 부모님을 초대할지 결정하는 것과 다르게 이것은 피할 수가 없는 이야기다. 지금 나누어야 하는 이야기다.


나는 대중문화를 좋아한다. 특히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아이돌은 나의 일상의 일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어릴 때에는 내가 좋아했지만, 지금은 안타까운 사람들이 있다. 나에게 ‘마름’과 ‘예쁨’을 종용했기에 너무나 얄밉지만,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기에 생각할수록 마음이 아픈 여자들. 버티고 있는 것이 대단했던 여자들. 그들도 눈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가 온수를 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자살이 아니다. 살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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