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몸 노래 - 나의 육체의 꿈

by 머쓱

알몸 노래 - 나의 육체의 꿈/문정희


이 추운 겨울날에도

식지 않고 잘 도는 내 피만큼만

내가 따뜻한 사람이었으면

내 살만큼만 내가 부드러운 사람이었으면

내 뼈만큼만 내가 곧고 단단한 사람이었으면

그러면 이제 아름다운 어른으로

저 살아있는 대지에다 겸허히 돌려드릴 텐데

돌려드리기 전 한번만 꿈에도 그리운

네 피의 살과 뼈를 만나서

지지지 온땅이 으스러지는

필생의 사랑을 하고 말 텐데


- 시집 <오라, 거짓 사랑아> 중에서, 민음사, 2008





쉬는 날입니다. 습관대로 일찍 눈이 떠졌습니다.

오늘은 인터넷을 써야하는데, 제 방에서는 와이파이가 안 됩니다.

그래서 집 근처 맥도날드에 가서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간단하게 채비를 하고 나와 5분 정도 걸어서 맥도날드에 도착합니다.

아침 메뉴(colazione)로 쇼콜라 코르네토(초콜릿 크루아상)와 카푸치노를 주문하고 자리를 잡습니다.

맥도날드의 아침 메뉴는 저렴하고 맛있어서 종종 이용하는데, 쇼콜라 코르네토는 인기가 많아서 빨리 없어집니다. 다행히 오늘은 남아있었습니다.

기분 좋게 노트북에 와이파이를 연결하고 회사 홈페이지에 들어갑니다.


저희 회사 홈페이지에는 후기 게시판이 있습니다. 투어를 들은 손님들이 투어가 어땠는지 후기를 남기는 곳입니다. 이 후기는 여러모로 중요합니다. 투어 가이드는 상사와 일을 하지 않기 때문에, 손님들의 후기가 곧 평가가 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후기의 갯수와 질이 회사에서 저의 입지에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하지만, 저는 그런 것을 신경쓰는 편은 아닙니다. 손님들의 후기를 읽다보면 제 투어의 장점을 알 수 있고, 고쳐야 할 점도 배울 수 있습니다. 또 여행이 끝나고도 제가 한 투어가 기억난다는 것을 알 수 있어서 보람을 느낍니다. 무엇보다도 귀한 시간을 내어 일부러 홈페이지에 들어와 후기를 써준다는 게 쉽지 않다는 걸 알아서 감사할 뿐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제 이름을 단 후기가 올라오면 열심히 답글을 답니다.


카푸치노를 마시며 회사 홈페이지의 후기 게시판을 들여다봤습니다. 게시판 맨 위에 제 이름이 보였습니다.


“박무늬 가이드님…”


조금 놀랐습니다. 말줄임표로 뒤가 생략되어 있어서 뭔가 부정적인 뉘앙스가 풍깁니다. 저는 아직까지 부정적인 후기를 받아본 적이 없거든요.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열었습니다.


다행히 말줄임표에는 “나에게 최고의 가이드”라는 말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이 글을 쓰는 시점은 11월인데, 한 여름에 투어를 듣고 가셨던 손님이 쓴 후기였습니다. 자신이 느꼈던 좋은 느낌을 다른 손님들도 느꼈으면 한다고, 시간이 흘렀지만 추천하는 글을 쓴 것이라고 합니다. 글을 읽어내려가다 한 문장에서 울컥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방법은 암기가 아니라 관심입니다.


이 손님은 제가 하는 투어가 로마와 바티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우러나온다고 느끼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좋은 투어였다고 말하셨습니다. 이 문장 앞에서 저는 오래 멈춰있었습니다.


‘사랑’이라는 단어는 참 어렵습니다. 입에 담으면 담을수록 무거워집니다. 입 밖으로 꺼낼 때마다 몸이 가라앉는 기분이 듭니다. ‘내가 사랑하고 살고 있을까?’라는 기분이 들며 스스로 반성하게 됩니다. 제가 이 단어를 자주 담으면서도 조심스러워진 데에는 한 친구의 영향이 큽니다.


저는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생각나는 친구가 있습니다. 지금은 검은 고양이를 키우고 있는 수지입니다. 스물세 살의 가을에 우리는 연극을 했습니다. 연습이 끝났던 어느 날, 중국 요릿집에서 술을 잔뜩 마시고 다들 제정신이 아닐 때 친구들에게 제가 물어봤었습니다.


“너희들의 삶의 원동력은 무엇이니? 뭘 기대하고 있으니까 살아있는 거 아냐?”


그 자리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자살에 대해 낙관적이었기 때문에, 그렇다면 무엇이 우리를 살게 하고 움직이고 있는 것인지 궁금했습니다. 그러자 수지는 대답했습니다.


“나는 사랑이야. 사람에 대한 사랑. 세상에는 사랑이 분명히 있어.”


뜬금없는 로맨티스트 선언이었습니다. 우리는 평소에 무기력함의 대명사인 수지의 입에서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황당했습니다. 그리고 ‘네가 무슨 사랑이야’ 라며 박장대소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 자리에 있던 친구들 모두 수지를 사랑했습니다. 그 뒤에 우리는 자주 만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그때의 수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수지의 말이 마음속 깊이 남아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그날의 수지가 떠오릅니다. 매체에서 많이 보이는 아름다운 추억 속 첫사랑도 아니고, 연인 간의 성애적인 사랑도 아니고, 심지어 가족 간의 필연적인 사랑도 아닙니다. 한 사람을 자신으로 살아가게 하는 동력이 되는 사랑입니다. 어떤 상황을 버티며 자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을 보면 그 기저에는 사랑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합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사랑한다는 것일까요? 사랑에는 대상이 꼭 필요한 걸까요? 아니, 제가 말하고 있는 ‘사랑’이 도대체 무엇일까요?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들을 하고 있는 중에, 박상영 작가의 연작소설집 『대도시의 사랑법(창비, 2019)』을 읽었습니다. 마지막 이야기인 「늦은 우기의 바캉스」에 이런 부분이 나옵니다.


요즘 나는 매일 조금씩 부서지는 것 같다. 내 기억 속 규호와 같은 방식으로 부서지고 흩어지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런 확신에서 좀체 벗어나기 힘들다....(중략)... 때때로 그는 내게 있어서 사랑과 동의어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내게 규호의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규호의 실체에 대해 말하는 것은 사랑의 존재와 실체에 대해 증명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중략)… 내 소설 속 가상의 규호는 몇 번이고 죽고 다치며 온전한 사랑의 방식으로 남아 있지만 현실의 규호는 숨을 쉬며 자꾸만 자신의 삶을 걸어 나간다. 그 간극이 커지면 커질수록 나는 모든 것들을 견디기가 힘들어진다. 지난 시간 끊임없이 노력하고 애써왔지만 결국 나의 몸과 나의 마음과 내 일상에 남은 게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더 여실히 깨달을 따름이었다. 공허하고 의미 없는 낱말들이 다 흩어져 오직 글을 쓰고 있는 나 자신만이 남는다. 어깨를 잔뜩 구부린 채 미간에 짙은 주름을 짓고 잇는 내가 나 자신의 호흡만을 들을 수 있는, 그런 세상. …(중략)… 나는 결국 풍등에 두 글자만을 남겼다. 규호. 그게 내 소원이었다.


「늦은 우기의 바캉스」는 이별 후의 이야기입니다. 사랑했던 규호에 대해 글을 쓰지만, 필연적으로 기록의 글쓰기는 과거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의 소설과 현실의 간극을 느끼며 그는 공허함을 느낍니다. 결국 남은 것은 글을 쓰고 잇는 자신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풍등에 쓰는 소원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작가의 말에서 또 한 번 그는 사랑을 이야기합니다.


글을 쓸 때 (혹은 일상을 살아갈 때) 홀로 먼지 속을 헤매고 있는 것처럼 막막한 기분이 들 때가 대부분이지만 가끔은 손에 뭔가 닿은 것처럼 온기가 느껴질 때가 있다. 나는 감히 그것을 사랑이라고 부르고 싶다. 사랑이라는 감정이, 말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지 너무나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시금 주먹을 꽉 쥔 채 이 사소한 온기를 껴안을 수밖에 없다. 내 삶을, 세상을 사랑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단지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 오롯이 나로서 이 삶을 살아 내기 위해.


우리가 존재에 대한 공허함을 느낄 때, 살아 있는 것이 버겁기만 할 때, 혹은 ‘오롯이 나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내가 나 자신이라는 사실이 몹시 견디기 힘든’ 모순적인 감정을 느낄 때…. 이런 순간에 버티게 하는 것이 사랑이 아닐까 합니다.


수지의 사랑, 박상영 작가의 사랑, 그리고 저의 사랑까지 생각해보아도 여전히 사랑은 어렵습니다. 사랑이 무엇인지 보다, 사랑을 하는 방법을 이야기하는 게 차라리 더 쉬울 것 같습니다.


그런데, 후기를 쓴 손님이 제가 사랑하는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저는 사랑하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꼭 무엇인지 알고 해야 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혹시 ‘내가 어떤 사람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사랑이 아닐까요? 추운 겨울에도 식지 않는 피만큼 따뜻하고, 저의 살만큼 부드럽고 두텁고, 저의 뼈만큼 단단하고 곧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마음이요. 온 땅이 으스러질 것 같은 사랑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KakaoTalk_20191120_104825305.jpg 트레이시 에민(Tracey Emin), 'Sad Shower in New York(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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