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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오 May 14. 2023

광주시민의 광주 비엔날레 무료전시 여행기

부드럽고 여린 마음을 사랑하는 것


짙은 우울감에 숨이 막혀오는 날이었다. 팽팽하게 당겨지던 정신줄이 작은 충돌에 툭하고 끊어져 살아갈 기운이 조금도 나지 않던 5월의 어느 날. 나를 힘겨운 집 안에 그대로 방치하는 건 나를 사랑하는 길이 아니었다. 그렇게 어떻게든 도망칠 곳을 생각했다.


23년 광주의 봄은 무척 상냥하고 따스했다. 4월 7일 개막한 광주 비엔날레는 7월 9일까지 본관을 비롯해 광주 곳곳에서 무료 전시가 운영된다. 저번 달 본관 유료 전시를 보고 시간이 부족해 다른 전시관을 미처 돌아보지 못했던 게 생각났다. 그렇게 나는 이번 주 스케줄을 조정해 광주 비엔날레 무료 전시 여행을 하게 되었다.



처음 방문한 곳은 서구에 위치한 무각사이다. 광주에 몇 안 되는 도심 속에 있는 절이다. 몇 년 전 무각사에 방문할 때 이용했던 카페는 전시관이 되어 있었다. 전반적으로 건축을 새로 하면서 모던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었다.



개인적으로 좋았던 흐엉 도딘의 작품들. 직접 보면 간결하고 투명해 보이지만 여러 질감의 선으로 중첩된 유화 그림의 존재감이 상당하다. "이 선들은 방향을 알려주지만, 목적이나 출발점이나 도착점을 알려주지는 않는다." 캔버스 위의 저 선들은 또 어떻게 연결되고 이어질까? 삶처럼.



본관 건물 내부로 들어서면 명상실에 설치된 작품을 볼 수 있다.

명상을 하듯 비디오를 감상하며 앉아있으면 물속에 고요히 침잠하는 기분이 든다.



전시를 마치고 나와 방문한 카페는 운천역 근처의 카페 무난. 꽃차를 마시며 조용히 독서할 수 있는 고즈넉한 공간이었다.



둘째 날은 남구 양림동의 호랑가시나무 아트폴리곤을 방문하였다.



오르막길을 올라가면 우일선 선교사사택 옆에 조용히 자리한 전시공간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인상 깊었던 작품. 해양부유물 및 폐기물들의 움직임을 지도에 표시하여 나타내었다. 버려진 물건들의 <사후세계>라는 표현이 인상 깊다. 우리가 경시하는 물질들의 이동을 숭고하게 추적하고 기록해 낸 작가의 태도 역시 기억에 남았다.



다른 전시관 지상층을 모두 차지하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을 통해 키네틱 아트에 대해 흥미가 생겼다. 어떤 물질의 움직임이 다른 물질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이 소리가 되고 다시 순환되는 시스템은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계와 아주 닮아있지만 언제나 늘 신기하고 경이롭다.



오늘 전시를 마친 후에는 신학대 내부의 카페 파세아르에 방문하였다. 선선한 햇살과 향 내음이 어우러지는 곳으로 마음이 차분해지고 풍요로워지는 기분을 느낄 수 있다.

양림동은 많은 예술가들이 작품을 작업하는 곳이기도 하다. 골목골목을 다니다 보면 비엔날레를 기념해 오픈 스튜디오를 진행하는 가게들을 발견할 수 있다.



셋째 날, 동구 장동에 위치한 예술공간 집을 방문했다.



전남여고를 마주하고 오래된 동네의 골목 사이에 위치한 예술공간 집에서는 64분 길이의 영상을 전시하고 있었다. 입장했을 당시 30분 정도가 진행되어 후반 30분을 감상하였다.



개인적으로 매우 울림이 컸던 작품이었다. 이 작품 하나를 보기 위해 예술공간 집에 방문해도 아쉽지 않다. 비엔날레를 기획할 때 작품을 어디에 전시하는 게 가장 작품을 잘 살리는 방법일지 많은 사람들이 고민한 결과라고 생각하니 그 사람들의 고민과 진심이 마음에 전달되는 듯했다.


감상을 마치고, 근처에 위치한 샌드위치 맛집인 이치위치를 방문해서 트럼프번 샌드위치를 먹었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위치한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각종 전시를 추가로 관람하는 것도 좋다.



넷째 날 마지막으로 북구 매곡동에 위치한 국립광주박물관을 방문했다.



아름다운 자기의 모습만 감상해 왔는데, 기술이 발전하기 이전 도자기 대량 생산을 하는 과정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 당시 기록과 함께 일정한 형태의 미학을 유지하고 있는 자기들을 보면 여러 감정을 경험하게 된다.



캔디스 린의 설치미술 역시 강렬하게 느껴진다. 전시관 중앙을 크게 자리하고 있는 작품은 신기하기도 하고, 직관적이지 않아 여러 호기심이 들기도 하고, 때론 이해되지 않아 답답함을 느끼게도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그 기이함을 하나하나 느끼며 사물들의 배치와 영상의 내용을 추리하는 과정 자체가 재미있었다.



처음 로비에 설치된 이 공간을 보고 무엇일까 궁금했는데 나중에 비엔날레 전시 작품임을 알게 되었다. 이게 한국적인가? 감상자들에게 의문을 일으키게 하는데 그것이 작가가 의도한 부분이었다.



전시를 감상하고 난 후에는 북구 일곡동으로 이동하여 차차룸에서 식사를 마쳤다.

전시를 마치고 방문한 가게들은 모두 맛도 분위기도 만족스러워서 전부 추천한다.




이번 비엔날레의 작품을 돌아보니 이주나 이민의 경험을 한 작가들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민자 집안에서 자라 정체성에 혼란을 겪기도 하고, 전란을 피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이주를 해야만 했던 작가들도 있었고, 가족들과 분리되어 살아야 했거나, 장애나 질병으로 고통을 받았던 작가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전시 작품들 속에는 나와 다른 존재에 대한 사랑과 포용, 사라지는 것들에 대한 기억, 나의 아픔을 통해 누군가 치유되기를 바라는 마음 등이 곳곳에서 느껴졌다. 작가들은 저마다 가진 외로움과 쓸쓸함으로 더 많은 세상을 기억하고 품어낼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시는 외로움이 소통되고 사랑으로 연결되는 공간인 것 같다. 외롭고 우울할 때 전시가 생각나는 것도 어쩌면 자연스러운 끌림일지도 모르겠다.



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리게 일까? 세상엔 물 같은 마음이 자리할 공간이 없다. 누군가에게 여리다는 말은 치욕을 주고, 부드럽다는 말은 세상을 살기엔 너무 나약하다는 인상을 주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사람들 살게 만드는 건 부드럽고 여린 마음이다. 상처받은 사람을 일으키는 힘도, 외로움을 씻어주는 마음도, 갈등을 풀어내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도 거기서 시작된다. 마치 생명체가 존재하기 위해 물이 필수조건인 것처럼.


그래서 광주 비엔날레는 쾌적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물처럼 부드럽고 여린 마음을 담아내었다. 어딘가에서는, 그 마음의 가치를 알고 세상에 풀어내고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잊지 않고 기억하는 것. 기억의 힘은 지지 않는 것을 의미해서, 그것은 마치 5월의 광주와 많이 닮아있는 것 같다. 많은 사람과 연결된 기분을 느끼며 이번 전시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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