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44: 무엇이든 주는 도토리나무
루나는 깊고 고요한 숲 속을 걷다가, 한참 동안 떠돌던 끝에 거대한 도토리나무를 발견했다. 나무는 마치 숲의 중심을 이루는 듯 우뚝 서 있었고, 굵고 튼튼한 가지들이 사방으로 뻗어 있었다. 나무가 바로, 마을의 모든 동물들이 지혜를 구하러 찾아온다는 유명한 도토리나무였다.
도토리나무는 이미 많은 동물들의 고민을 해결해주고 있었고, 그들의 문제를 들어주며 위로와 조언을 아낌없이 주는 존재로 알려져 있었다. 루나 역시 그 소문을 들었기에 도토리나무에 대해 호기심을 느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루나는 나무 앞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왠지 모르게, 나무의 분위기에서 깊은 슬픔 같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그때, 작은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나무 앞에 다가와 조심스럽게 말했다.
"도토리나무님... 저는 너무 외로워요. 친구들이 다 저를 멀리하는 것 같아요. 제가 무언가 잘못한 걸까요?"
도토리나무는 잎사귀를 살며시 흔들며 부드럽게 대답했다.
"때론 다른 이들이 너에게 멀어지는 것처럼 보여도, 그것은 그들만의 고민과 이유가 있을 수 있단다. 모든 이가 너를 생각하지 못하는 순간도 있지만, 그건 네 잘못이 아니야. 네가 스스로의 가치를 잃지 않고 있다면, 언젠가는 진정한 친구들이 다시 찾아올 거야."
다람쥐는 도토리나무의 말을 듣고 위로를 받은 듯 작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한 뒤 숲 속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루나는 다람쥐가 사라진 후에도 계속 도토리나무를 지켜보았다. 도토리나무는 여전히 묵묵히 서 있었지만, 그 가지가 바람에 흔들릴 때마다 알 수 없는 무거움을 느끼게 했다.
루나는 조심스럽게 도토리나무에게 다가가 물었다.
"나무야, 왜 그리도 많은 이들이 너를 찾아와? 그리고 모든 이들의 고민을 들어주고, 해결해 주면 지치지 않아?"
도토리나무는 잠시 침묵을 지키다가 천천히 대답했다.
"나는 이 숲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많은 이들의 이야기를 들었지. 하지만 그게 내가 지혜롭거나 대단해서가 아니야. 나는 그냥 물어보는 것에 그저 들은 걸 말하는 것뿐. 그걸 알게 된 동물들이 찾아올 뿐이야. 나도 나름의 고통을 겪고 있어. 꼼짝없이 이곳에 박혀서 쓸쓸히 비바람 사계절을 견디며 벌레와 동물들이 속을 파먹고, 가끔 나를 버려는 나무꾼들도 그저 견디며 사는 거지"
"그렇게 힘든데, 너는 누가 도와주니? 항상 넌 도움을 주잖아."
도토리나무는 잔잔한 바람에 잎사귀를 흩날리며 말했다.
"그렇지. 나는 그들에게 도움을 주는 게 내 역할이라고 생각해. 그러나 정작 나 자신에게는 아무도 물어보지 않아. 나는 내 뿌리 깊은 곳에서 피어나는 고통을 이야기할 곳이 없단다. 나는 그저 서 있을 뿐이지."
루나는 그 말을 듣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녀는 도토리나무가 자신을 돌보지 않고 다른 이들을 돕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고단할지 상상했다.
"그럼 왜 그런 고통을 홀로 짊어지고 있는 거야? 그 고통을 나누면 되잖아."
도토리나무는 슬며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고통을 나누는 것은 쉽지 않아, 루나. 이 숲 속의 동물들은 나를 찾아와 위로와 지혜를 구해. 그들의 기대와 신뢰 속에서 살다 보니 내 상담사, 정신과의사 같은 역할이라는 게 생겼고, 정작 내 고통은 말할 곳이 없어진 거지. 내가 만약 그들에게 고통을 털어놓는다면, 진정성이 떨어질지도 몰라."
루나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표정으로 나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네가 지쳐간다면 결국 더 이상 도움을 줄 수 없게 되는 거 아냐?"
도토리나무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그럴 거야. 하지만 나는 그저 내 자리에 서 있을 뿐이야. 동물들은 나를 의지하고, 나는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주기 위해 계속 서 있을 수밖에 없어."
루나는 도토리나무의 말을 들으며 점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는 이렇게 묵묵히 다른 이들을 돕기만 하는 도토리나무가 자신을 잃어가는 것이 슬펐다. 루나는 그저 조용히 도토리나무 옆에 앉아 있었다. 함께 있어주는 것만이 지금의 도토리나무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라고 생각했다.
시간이 흘렀고, 또 다른 동물들이 도토리나무를 찾아와 저마다의 고민을 털어놓았다. 도토리나무는 여전히 친절하게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해결책을 제시했다. 하지만 그 뒤편에서 나무의 가지는 점점 더 무거워져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