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뭉뚝한 연필

by 권수

처음엔 길고 날카로웠다.

단단한 심지가 가득 차 있었고,
칼날처럼 예리한 선을 그었다.


손길을 따라 굴러가며
책 위에, 벽 위에, 종이 위에
조금씩 자신을 깎아 나갔다.


깎이고, 깨지고, 흑연을 흩날리며
속살을 갈아먹고,
지우개에 지워지면서도

흔적을 남기고
세상을 그리고 수놓았다.


처음처럼 뾰족하진 않지만
더 이상 날카롭지 않아도
부드러운 선으로 더 많은 이야기를 남긴다.


길쭉한 연필, 깍이지 않은 연필의 모습이 멋져도
세상에 가장 깊은 흔적을 남긴 건
끝이 닳고 닳은, 뭉뚝한 연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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