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무살 시절의 기억
우리는 여섯 명이었다. 친구. 아니, 어쩌면 그 이상이라고도 할 수 있던 우리는 서로 믿고 의지했으며, 모든 기숙사가 소등되면 창문을 커튼으로 가려둔 채 촛불을 켜고 밤새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그때 우리는 스무살. 그리고 이 곳은 용인의 촌구석에 있는 기숙사형 재수학원, 흔히들 말하는 ‘스파르타식 학원’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늘 함께 몰려다니던 우리는 어느날 새로 학원에 들어온 형을 만났다. 형이라고 말하기 어색할 만큼 나이를 먹은 그는 서울대 법대만 목표로 하다보니 어느덧 10년도 넘게 흘러버렸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실제로 서울대 다른과에 몇 번 붙기도 했다는 형은 공부도 무척 잘 하는 편이었기에 꽤 믿음이 갔다. 그렇게 한 달 쯤 지난 어느날, 형이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군인처럼 지내느니 차라리 인천에 있는 우리 집에서 함께 공부하는 건 어때? 모자란 과목은 근처 단과학원에 가면 되고, 나도 입시 공부만 20년 가까이 한 셈이니 적어도 여기보단 더 잘 가르칠 수 있어.”
우리는 형의 말에 혹했다. 어쩌면 당시 우리는 그 어떤 말에도 혹했을 것이다. 무조건 이 짐승 같은 스파르타 학원을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그렇게 단숨에 우리들을 설득한 형은, 다시 우리들 집을 하나씩 방문하여 부모들을 설득하고(이 부분은 지금 생각해도 좀 기이하다. 대체 어떤 방법을 쓴 것일까?) 우리를 데리고 자신의 집으로 갔다. 매달 우리가 학원에 내는 돈보다 30% 정도 더 많은 돈을 줬던 걸로 기억하는데, 거기에 대해 형은 아마 ‘학원보다 더 영양가 있는 식단과 편한 보금자리를 제공한다’는 감언이설을 썼던 것 같다. 물론 그 이후 우리가 몇 개월 간 먹었던 건, 형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시장통의 작은 식당에서 주는 부대찌개 뿐이었다. 매일 삼시세끼 부대찌개만 먹다보니 3840유격대라도 된 것 같았다.
갈등은 서서히 시작됐다. 그런데 그 갈등은 형과 우리들 사이가 아닌, 우리끼리의 갈등이었다. 형은 마치 소설 ‘파리대왕’을 50번 정도 읽은 사람처럼 ‘우리’라는 작은 사회를 능수능란하게 다뤘고, 그로 인해 우리 여섯은 서로 서열을 정하거나, 패를 나누기도 했다. 심지어 형의 동거녀(음식을 담당한다는 미명 아래 형과 함께 살고 있던)에게 잘 보이기 위해 집에서 엄마 화장품을 몰래 훔쳐오는 녀석도 있었다.
초반에 열성적으로 우리의 공부를 코치하는 척하던 형은 언젠가부터 얼굴도 보기 힘들어졌고, ‘온종일 자율학습’을 하던 우리들은 싸우는 일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정말 말도 안 되는 사소한 일들도 시비거리가 되었다. 그리고 우습게도 이런 싸움은 결국 ‘먹는 것’으로 귀결됐다. 참 원시적이지만, 어떤 면에선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결정적인 다툼의 내용은 간단했다. 우리는 3:3으로 패가 갈렸는데, 상대편 녀석들이 몰래 형의 동거녀와 함께 햄버거를 사먹다가 우리에게 들킨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별 일 아니지만, 당시 그건 우리에게 정말 많은 것을 의미했다. 여섯 명의 삼시세끼 같은 걸 먹는 상황이었으므로, 간식이나 군것질 역시 당연히 함께여야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그 맛좋은 선진국 음식, 햄버거라니! 우린 분노했다. 그리고 이 분노는 이 집을 실미도와 다름없는 지옥으로 바꿨다. 떠나고 싶었다. 짐승과 다름없는 유치한 싸움에 더 이상 개입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하면 거짓말이고 그냥 햄버거 정도는 맘편하게 먹으며 살고 싶었다. 그리하여, 나는 외출을 얻어 집으로 왔다. 그리고, 부모님을 앉혀놓고 말했다.
“선생님이 어떤 여자랑 동거를 하고 있어요.”
그걸로 모든 건 끝났다. 난 ‘애들이 나만 빼고 햄버거를 먹었어요’라는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었다. 그날 밤, 인천으로 돌아갔을 때 집안은 아비규환이 되어 있었다. 형은 상기된 얼굴로 깡소주를 마시고, 누나는 침대에 기대 울고 있었다. 다섯 명의 아이들은 마치 황제의 시종들처럼 덩달아 그 옆에서 울그락불그락하고 있었다. 형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술잔을 내던지며 외쳤다.
“야 이 새끼야. 누나가 창녀냐?! 창녀냐고!”
그 사이 어머니가 전화를 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대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동거녀는 창녀가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무튼 형은 그렇게 받아들였고, 난 굳이 변명하지 않았다. 그냥 조용히 이불과 짐을 싸들고 집을 나섰다. 누나 옆에서 함께 화난 척하던 두 명의 친구도 함께 얼른 일어나 자기 짐을 챙겨 날 따랐다.
오렌지색 전구가 꺼졌다 켜지기를 반복하는 동인천 역에서, 커다란 짐가방에 이불을 말아 안은 우리는 서울로 가는 막차를 기다렸다. 나는 반 년간 함께했던 모두를 한방에 배신한 적장이었고, 친구들은 배신자인 나를 따라나선 죄많은 장수였지만, 우리는 어쩐지 배신했다는 기분이 들지 않았다. 배신이라는 건 상대적인 개념일 뿐이니까, 라는 위대한 생각은 하지 못했고 그냥 속이 시원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때 우리 기분은 오히려 혁명가에 가까웠던 것 같다.
어느덧 저 멀리서 땡땡~ 소리와 함께 기차가 다가왔다. 자, 이제 떠날 시간. 우리가 울고 웃던, 하지만 배신할 수밖에 없었던 그 곳에서 벗어날 시간이 온 것이다. 바로 그때, 늘 말이 없던 안경잡이 친구가 입을 열었다. “우리…” 우린 그를 봤다. 뭔가 위대한 한마디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친구가 한 말을 이거였다.
“우리, 이제 인천 방향으로는 오줌도 싸지 말자.”
어쩐지 우린 그 말에 활짝 웃으며 깔깔댔다. 그때, 배를 잡고 쓰러지던 우리의 웃음을 나는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철없던 세 명의 어린 배신자들은 또 다른 세상을 향해 한 걸을 더 발을 내디뎠다. 그리고 나는, 지금까지도 될 수 있으면 인천 쪽으로는 오줌을 싸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