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자전거 도둑 1

희망의 흉내

by mupdayz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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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브레이크를 잡는다면, 당신은 이길 수 없다.

-마리오 치폴리니 (이탈리아 자전거 영웅)




1. 희망의 흉내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어."


정인은 그렇게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붙잡지 못했던 건 그녀의 말에 수긍할 수 있어서였다. 우리에게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아니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에게 남은 것은 이제, 아무 것도 없다. 석구는 생각했다. 그녀는 희망을 찾아 떠난 것이다. 한 때 우리에게도 희망이라는 것이 있긴 했다. 시간이 날 때 함께 배낭을 메고 전 세계를 여행하자고. 아니, 주머니 사정이 허락하지 않는다면 동남아 시골 동네를 누비는 것도 좋겠지. 시간이 날 때 가끔 영화도 보고, 식사를 하고 따뜻한 커피를 마주한 채 이야기를 나눈다면 그것도 나쁘지 않아. 그리고 적당한 시간이 되면 결혼하는 거다. 함께 작은 집에서 우리만의 시간을 영위하는 거야. 언젠간 아이도 낳겠지. 뭐 그런 장밋빛 꿈을 꾸었다. 석구가 취준생이라는 타이틀을 5년째 고수하기 전까진.


정인은 결국 나를 포기했다. 대학생 시절부터 끈질기게 그녀를 쫓아다니던 호판이 작은 벤처기업을 세웠는데 그 회사가 대박이 나서 올해의 가장 촉망받는 5대 벤처 기업가 중 하나로 신문에 떡하니 사진과 함께 이름이 실려 버렸기 때문이다. 어지간하면 그 쥐좆만한 호판을 이길 자신이 있었지만 이쯤 되면 그 녀석은 이미 석구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먼 곳까지 다달은 것에 다름없다. 정인은 무너졌다. 석구와의 흙길대신 호판과의 꽃길을 선택했다. 이 정도면 사실 그녀를 비난할 만한 아무 이유도 없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지하철 플래트홈에 서서 병신처럼 울었다. 지하철 안에서도 병신처럼 울었다. 지하철 역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도 병신이긴 매한가지였다. 집으로 돌아와 어두운 밤에 홀로 라면을 끓여먹으면서도 울었다. 소주 두 병을 비우고 방에 들어와 이불을 싸매고 병신처럼 울었다. 그러다 잠이 들었고, 덜컥 방문 여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퉁퉁 부운 눈과 굴러다니는 소주병을 보며 형이 기차게 혀를 찼다.


형이 출근한 후, 텅빈 거실 소파에 홀로 앉은 석구는 멍히 TV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침 토크쇼에서는 마누라가 보증을 잘 못 서 수십억의 빚을 떠안고 결국 이혼하게 되고, 홀로 이 악물고 열심히 일해서 3년만에 30억의 빚을 갚았다는 어느 2류 개그맨의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아주머니들의 안타까운 리액션들과 함게 흘러나오고 있었다. ‘연예인은 정신만 차리면 1년에 10억씩 벌기도 하는구나. 세상에서 가장 쓸데없는 걱정이 연예인 걱정이라더니...’ 그리곤 채널을 돌리니 이번엔 ‘서민부자’라는 프로그램에서 1년 365일 뼈빠지게 일해서 1년 매출(순익이 아니다) 5억을 달성한 골목시장 떡집 사장이 출연해, 늦은 저녁 가게문을 닫고 안마의자에 앉하루의 피로를 풀고 있었다. 헛웃음이 났다. 웃기는 세상. 이게 다 무슨 의미람.


TV를 끄고 방으로 들어가 컴퓨터를 켰다. 은행계좌에 들어가니 잔액이 보인다. 거금 500만원이 들어있다. 1년간 아르바이트를 하며 꼬박꼬박 모은 돈이다. 정인과의 여름여행을 위해 비밀리에 모은 돈이다. 이 돈이면 저가 항공사의 이코노미 석을 타고 갔을 경우 동남아의 특급 호텔에서 근사한 조식과 멋들어진 클럽서비스를 받으며 일주일 동안 귀족처럼 보낼 수 있는 돈이다. 그녀에게 이 여행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의미가 없어졌다. 석구는 이 돈을 어디에 쓸 것인가 고민했다. 조금만 더 열심히 아르바이트를 해서 4억 9천 5백만원만 모으면 괜찮은 전세 아파트 하나 정도 마련할 수 있는 돈이다. 그 고지가 마치 나와 호판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그냥 내가 쥐고 있는 이 5백만원으로 호판과 나의 거리를 최대한 좁힐 수 있을 만한 아이템을 가질 수는 없을까. 그러다 생각났다. 언제나 갖고 싶었던 것. 안정적인 직장에서 따박따박 월급을 받는 멀끔한 직장인이 보너스를 타면 가질 수 있을 만한 무엇. 날카로운 핸들링과 단단하고 가벼운 카본 바디에 무섭도록 향상된 제동력을 가진 디스크 브레이크를 가진 그것. 자전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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