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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문정 Jan 11. 2021

제3장. 이별에 대한 과정.

외할아버지께서 돌아가시다.

초등학교 6학년이 되고 나서 별달리 기억나는 건 딱히 없지만 봄이 지나가고 여름이 다가오고 있는 중이었을 것이다.
외갓집이랑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자주 외할아버지네 집에서 자다가 깨서 이른 새벽에 우리 집으로 와 학교 갈 준비를 하고 서둘러 등교를 한적도 종종 있곤 했었으니까.. 어느 날 저녁 늦은 밤 13살 무렵쯤.. 외할아버지께서 사이다 페트병에 소변을
보시는 걸 보게 되었는데.. 분명 그건 피오줌.. 그것도 진한 색.. 그냥 내 눈엔 피를 쏟아내는걸로밖에 보이지 않았었다. 나는 그때 애써 모른 채 했었다. 외할아버지 등 뒤에서 작은방에서 안방으로 들어가게 되다 우연히  보게 된 것이었고 외할아버지께서 내가 보게 된 걸 알면 막 화를 내시며 혼내시던가 아니면 창피해하시던가 그 둘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진짜 속마음으로는
"할아버지.. 왜 피오줌을 싸시는 거예요?"

라고 여쭤보고 싶었지만 딱히 그걸 물어봐서 굳이 혼나거나 할아버지를 당황스럽게 만들고 싶지가 않았었다.
그런데 지금도 그렇고 여태껏 아무에게도.. 실은 외할아버지께서 페트병에 소변을 보시는데 피가 페트병에 한가득이었었다는 말을 우리 가족들한테조차 말을 꺼내본 적이 없었다.
그 광경을 보자마자 가족 중 누군가에게는 알렸어야만 했었다. 그랬었더라면.. 어쩌면 할아버지께서는 우리 곁에 좀 더 머물고 계셨을지도 몰랐을 텐데.. 다시 되돌리고 싶은 시간이고 말할 수 있는 타이밍을 놓쳤음을 너무나도 후회하고 있다. 우리 엄마라도 아버지 곁에서 오래도록 함께 할 수 있고 마음 든든하게끔 보고 싶을 땐 언제라도 볼 수 있는 나날들을 내가 꼭 뺏어간 건 아닐까라는 이런 생각도 들기도 하고.. 할아버지께서 좀 더 우리 곁에 머무셨더라면 나의 인생도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라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었던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런 생각들을 해본들 이미 지나간 일이고 돌아가신 분이 다시 살아 돌아올 일도 없고 지금 생각해보면 전부 무의미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 이후 몇 개월 정도 지난 뒤.. 외할아버지께서 대학병원 진료를 받게 되셨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신장암.. 신장암이라는 3기에서 4기쯤.. 그 소식을 접해들은 가족들은 할아버지께서 잠깐 자리를 비우신 사이에 울며불며 집안이 발칵 뒤집혔다.
외할아버지께서는 병원 치료를 완강히 거부하시고 온전히 집에서만 투병생활을 하기 시작하셨다.. 물론 할아버지 앞에선 신장암이라는 걸 가족 모두가 말하지 않기로 하고선.. 그렇지만 날이 갈수록 할아버지 병세가 심각해져 가는걸 할아버지 본인께서도
 몸으로 느끼고 계셨을지도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자주 해본 적이 있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나에게 있어서.. 아니 우리 남매에게 있어선 아빠 엄마와 같은 존재 셨었다.
유치원 졸업식 때도 그랬었었고 초등학교 입학식 때도 엄마 대신 내 손을 꼭 잡고 함께해주셨었다. 우리 남매가 엄마 아빠가 항상 필요로 할 나이에 정작 우리 엄마는 생활전선에 뛰어드셔서 항상 바쁘셨었고 그 빈자리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께서 항상 대신 채워주셨었다.
학교 알림장도.. 각종 준비물도 비가 오면 우산 챙겨 학교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계셨었던 분도 항상 우리 외할아버지 셨었고.. 엄마가 챙겨줬어야 할 것들을 거진 반 이상을 할아버지 손길이 안 지나갔었던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가장 마음 아팠었었고 가슴 짠한 기억이 있었었다면.. 내 남동생이 말을 좀 늦게 텄었었는데.. 4살 때까지도 엄마. 맘마. 됐다. 이 정도의 짧은 단어만 할 줄 알았었는데 딱한 마디 못했었던 단어가 아빠라는 말이었었다. 왜냐하면 아기였었을 때부터 생전 불러 볼일이 없었기 때문에.. 그런데 할아버지를 보면서 아빠라는 말이 트이게 된 것이다.
손주한테 아빠라는 말을 듣게 된 할아버지와 그 놀라운 광경을 보게 된 엄마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내가 성인이 된 지금 생각해보건대.. 우리 할아버지 입장에서도 우리 엄마 입장에서도 기쁘고 놀랍고 대견스럽고.. 여러 미묘한 감정들보다는 억장이 무너질 것 같은 가슴 아픔이 가장 크게 다가오지 않았을까 한다.
이렇듯 우리를 자식처럼 돌봐주시고 키워주다시피 하신  우리 할아버지께서 많이 아프시고 돌아가시게 될 거라니.. 정말 믿기지 않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색하게도 할아버지의 병세는 날이 갈수록 나빠지셨고 하루하루가 다르게 눈에 띄게 몸이 수척하게 말라가셨다.
건강하실 땐 자전거를 무척 잘 타시고 즐겨 타셨었는데.. 자주 날 뒤에 태우고 학교까지 바래다주신 적도 종종 있으셨었는데.. 그 즐겨 타셨었던 자전거 체인이 낡게 녹슨 체 기름칠이 마른 지 오래였고 주인 잃은 자전거가 돼버렸다.
그렇게 할아버지 몸 또한 낡은 자전거와 같이 녹이 점점 슬어가셔서 더 이상 녹슨 체인을 광택 나게끔 새 자전거처럼 복구시켜 놓을 수 없을 지경까지 가시는 걸 바라보며( 아무래도 할아버지.. 우리 다 큰 모습도 못 보시고 떠나실 거 같아..) 이런 생각이 들 정도였었다.
지팡이를 짚고 할아버지 집 주변을 몇 번 왔다 갔다 하시는가 싶더니 이내 지쳐 털썩 큰 돌덩이에 주저앉으셔서 이내 가쁜 숨을 몰아쉬시던 할아버지 모습이 내 머릿속에서 항상 지워지지가 않는다.
암은 그렇게 우리 외할아버지 몸을 점점 침범해가고 있었고 끝내는 자리에서 꼼짝 못 하고 대소변까지 받아내야 할 정도로 그렇게 살까지 쭉쭉 빠지게끔 할아버지의 모든 걸 다 빼앗아가고 있었다.
할아버지께서는 자리에 누워계시면서 단 한 번도 아프다는 표현 한마디 하지 않으시고  오른손에 5단짜리 묵주 하나만 손에 들린 채.. 할아버지께선 그때 당시 무슨 기도를 올리시고 계셨을까.. 도대체 누구를 위해 기도하셨을까.. 지금 생각해보니 가장 궁금한 부분이다.
할아버지의 아픔 고통 외로움 괴로움. 이 모든 걸 헤아리고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마음 아파할 수밖에 없었으며 죽음에 가까워가는 할아버지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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