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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성호 Feb 22. 2017

명예로운 의무



예전에 있었던 일이다. 참여정부 시절 한참 종부세 문제로 시끄러울 때였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도, 이 사회에서 돈을 벌고 여유가 생겨 부동산을 보유한 사람들은 당연히 종부세 같은 보유세를 내야 하며, 그걸로 부족하니 좀 더 다양한 방법으로 이 사회에 자신의 부의 일부를 환원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얘길 했었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연해 보이는 이 주장에 대해 너무나 이상한 논리라며 반론을 펴는 분이 있었다.

평생에 걸쳐 쉽지 않은 근면과 노력, 그리고 자신에게 주어진 행운 등을 기반으로 해서 재산을 모았으며 공짜로 상속받은 것도 아니고 노름해서 딴 것도 아닌데, 그런 재산을 가졌다고 해서 왜 사회에 공헌해야 할 "의무"가 생기냐는 것이었다. 물론 "호의"에 기반해서 사회에 기부를 한다면 그것은 대단히 훌륭한 일로 칭송받아야 할 일이지만, 그런 기부를 안 했다고 해서 "의무 불이행"으로 비난할 일은 아니라는 주장이었다.

덤으로 재산이 한 수백억 되어서 평온한 노후를 보내는 것에는 아무 관련이 없을 정도로 돈이 많다면 기부가 의무일 수도 있겠지만 그저 아파트 한 두채 가지고 있다고 해서 종부세를 수천만 원씩 물리는 것은 용납하기 힘들다는 불만을 늘어놓으셨다. 실제로 그분은 종부세 부과 대상자이기도 했다. 실제 금액이 수천만 원이었는지 수백만 원이었는지는 확인해 보지 않았다.

보통의 연장자였다면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입장이다. 비록 나보다 연장자지만, 그래도 노사모 활동을 통해서 만나게 된 분이고 참여정부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라서 사회에 대한 입장이 매우 진보적이었을 것이라고 추정을 했기 때문에 더욱 놀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점점 더 많은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된 뒤에는 재산의 사회 환원이 "의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는 점을 알게 되기도 했다. 내 생각과는 다르게 노사모 회원들의 사회와 경제에 관한 스탠스가 매우 보수적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덤이고, 일반인들의 경우는 그보다 훨씬 더 심하게 보수적이라는 것도 경험적으로 알게 된다.

결국 자신의 노력으로 근면하게 평생 모은 재산이라 해도, 또 그 재산의 양이 많고 적음에 관계없이 사회 환원의 "의무"를 지니게 된다는 내 생각은 아주 과격하며 소수만이 가지고 있는 급진적인 생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과연 그럴까?

물론 이 세상에는 매우 불성실하게 쾌락만을 좇으며 살아서 재산 한 푼 모으지 못하는 형태의 삶도 많이 존재한다. 그런 사람들은 재산의 환원 의무는커녕 재산 자체가 없다. 늙어서도 타인에게 손을 벌리며 폐를 끼치며 살아간다. 그런 사람들과 달리 성실하고 근면하게 욕망을 절제하며 살아온 사람들이 오히려 더 큰 의무를 지녀야 한다는 것이 불공평할 수도 있겠다.

쟤들은 베짱이처럼 평생 놀고먹었는데 쟤들한테는 없는 의무가 왜 나처럼 착한 사람에게는 주어지는가? 억울하다..라는 심정도 이해가 간다.

평생을 고생해서 겨우겨우 아파트 한 채 장만했고 그게 가격이 올라서 그나마 재산 같은 재산이 되었는데 거기다가 세금을 그렇게 물려 버리는 것은 내 평생의 노력의 대가를 정부가 빼앗아 가는 거 아니냐는 불만도 이해가 간다.

난 그래도 평생 살아오면서 주변에 어려운 사람들을 도울 만큼 도왔고, 내 덕에 먹고살게 된 사람도 많으니 그 정도면 사회에 환원은 충분히 한 거 아니냐고 생각하는 경우도 봤다.

이런 생각을 하는 분들 모두 진짜 훌륭한 분들이다. 한눈 한 번 팔지 않고 열심히 살아오셨고, 주변에 폐 안 끼치고 친지들에게 손 한 번 벌리지 않고 전쟁의 폐허 위에서 물려받은 재산 한 푼 없이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싫은 내색 한 번 없이 열심히 출근하고 힘든 일 궂은일 다 도맡아 하면서 오늘날의 상태를 만들어 낸 사람들이다.

그런 분들에게 세금을 더 내라,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라는 요구는 가혹할 수도 있다. 또 있는 재산이라 해 봐야 아파트 상가 등의 부동산뿐인데 거기서 나오는 월세로 근근이 생활비나 쓰는 수준인데 몇 백 몇 천의 세금을 추가로 내라고 하면 진짜로 억울할 것 같다. 심한 경우에는 그 세금 때문에 아파트를 팔아야 될 수도 있다. 이 험한 세상에 그나마 노후에 믿고 의지할만한 재산이라고는 그 부동산뿐인데 말이다.

과연 경제적인 면에서 내가 평생 근근이 모아 온 재산이 있다고 해서, 이 사회를 상대로 경제적인 환원을 해야 할 "의무"라는 것이 있는 걸까? 만약 그런 사회 환원을 한다면 그건 그저 칭송받아야 하는 선행 아닐까? 안 한다고 비난받아서는 안 되는 그런 호의적인 선행 말이다.

결론은 "의무"가 맞다.

길게 얘기하자면 매우 복잡한 얘기지만 쉽게 얘기할 수도 있다. 당신들의 그 재산을 당신들은 어떻게 모았는지 좀 더 겸허하게 생각을 해 보시라고 권하면 된다. 당신들이 받은 월급을 모아 그 돈으로 오늘날의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아파트를 살 수 있었냐고 물어보면 된다.

당신들은 그저 목동에 신시가지가 만들어질 당시 남들보다 약간 더 여유가 있던 관계로 싼 값에 아파트를 샀을 뿐이고 그 아파트 가격이 몇 배, 몇십 배로 폭등하면서 오늘날의 십 수억까지 올라간 것뿐이다. 그건 당신들의 노력의 대가가 아니고 이 사회의 구조적 문제로 인한 부동산 가격 급등의 대가였을 뿐이다.

남들이 못 산 아파트를 먼저 산 것에 대한 대가라고? 그게 복권이나 도박과 뭐가 다른가?

또 월급을 받았건 장사를 했건 당신들이 번 그 돈은 이 사회가 없었더라면 주어지지 않았을 소득이다. 50년대 60년대였다면 당신들이 그런 월급을 받고 그렇게 장사 수익을 얻을 수 있었을까?

근면하고 성실한 것 좋다, 그러나 르완다나 에티오피아(특정 국가를 예로 들어 죄스럽긴 하다.) 같은 국가에서 그 근면과 성실이 발휘되었다면 당신들이 아파트를 살 수 있었을까?

근면과 성실을 비하하려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 사회에서 부동산을 보유하고 있는 중산층의 현 상태가 오로지 근면과 성실만으로 이루어진 것은 절대 아니라는 점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당신들은 이 사회의 혜택을 봤고, 그 덕에 오늘날의 평온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사회는 대한민국이라는 이름의 민주공화국이고 당신들은 그 공화국의 유권자 대중이다. 이 공화국은 당신들의 힘으로 유지되고 있는 것이며, 불행하게도 당신들이 누렸던 행운이 당신들의 후대에는 이어지지 않을 것 같은 상황이다.

이에 이 사회의 구조를 유지하고 조금이라도 더 나아지도록 만들어야 할 의무는 누구에게 있을까?

기술이 발전하고 급속도로 사회가 변모하면서 이제 이 사회에서 일자리가 사라지려고 하고 있고, 젊은이들은 직업을 구하지 못해 저임금 알바에 시달리며 절규하고 있는데 그런 고통의 책임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그냥 미리 방비하지 못한 정치인들 책임일까?

큰 틀에서 이 공화국을 살려내고 유지하고 발전시킬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다. 그중에서 맨날 게으름 부리며 놀고먹는 인간 말종들이야 뭐 그렇게 살라 하면 되고, 유능하고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제대로 된 공화국의 시민이라면, 이 공화국을 살려야 할 책임과 의무가 있는 거 아니냐는 얘기이다.

이건 당신들이 뭔가를 잘못해서 지는 책임과 의무가 아니다. 그저 당신들이 이 공화국의 시민으로 태어난 탓에 지는 책임과 의무다. 당신들이 이 공화국의 유능하고 성실한 시민이기 때문에 더 져야 하는 책임과 의무일 뿐이다. 명예로운 의무다.

부디 동의하고 받아들여 주시길 빈다.


당신들이 그 의무를 외면하면 공화국은 결국 무너지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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