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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29. 2024

질량(G랄 ) 총량의 법칙이란?

경북대 법학전문대학원 김두식 교수가 펴낸 책 <불편해도 괜찮아>에 나온 ‘G랄 총량의 법칙’이 유행어가 됐단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생 동안 쓰고 죽어야 하는 ‘G랄’의 총량이 정해져 있다는 법칙. 어떤 이는 그 정해진 양을 사춘기 때 다 써버리기도 하고 어떤 이는 지긋한 나이에 늦바람이 들어 그 양을 소진시키기도 한다나. 김 교수가 지인에게 사춘기 딸에 관한 고민 상담을 하다 그 얘길 들었다고. 어쨌거나 저마다 죽기 전까지 어떤 식으로든 주어진 할당량을 반드시 다 쓰게 되어있다는 소리다. 그것이 고대하는 복(福)이든 피하고 싶은 화(禍)든 간에. 살면서 더러 겪곤 하는 이해하기 힘든 짓을 누군가가 할 적마다 대입시켜 봄직하다.



G랄은 본디 간질을 일컫는 말로 속된 욕도 되고, 분별없는 행동이나 마구 법석을 떨 때도 그 표현을 던진다. 그렇다고 아무나 쉽게 쓰는 단어는 아니다. 상스러운 비속어에 해당하므로 입에 마구 올리기 민망스럽지만 오늘은 대놓고 G랄이란 말을 실컷 써보기로 한다. 어느 땐 절로 욕 나오게 하는 인간사와 사회상을 정면으로 맞부딪히게도 되니까. 살다 보면 삶이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생각되는 면도 있지만 억울하게 여겨지는 점도 수두룩하니까. 수양 부족 내지는 인격 미숙 드러냄도 이제는 별로 부끄럽지 않은 나이, 고상한 척 우아한 척 내숭이나 떨 연배도 지났으니까.



김 교수가 퍼뜨린 G랄의 총량만 정해져 있는 게 아니다. 여기서 빌린 원기 총량의 법칙이란 게 있다. 사람이 일평생 쓸 수 있는 정기의 양은 무한대가 아니란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을 한 사람은 원기 곧 정기가 메말라 쉬 늙고 수명도 짧아진단다. 혈기방장한 시절의 남정네들은 유념할 일이다. 여기에 행복 총량의 법칙이란 것도 있다. 누구나 저마다 타고난 행복의 총량은 한정돼 있기 마련이라고 한다. 지금 내가 행복하다면 그로써 내게 주어진 행복 총량이 감소하므로 다가오는 고통에 대비할 필요가 있다는 것.



비슷한 행운 총량의 법칙도 있다. 나쁜 일이 생기면 곧 좋은 일이 일어날 테니 좌절하지 말고 버티라는 고마운 법칙이다. 고통 총량의 법칙도 마찬가지다. 지금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고통의 강도만큼 주어진 고통 총량의 소진을 의미하는 것이니 이제 곧 행복해질 징조라는 얘기다. 살다 보면 파안대소하는 날도 있지만 그보다 더 이런저런 고통과 불행 속에서 허우적대기도 하는 중생인지라 이에 나름 공감하며 위안을 넘어 혜안도 얻게 된다.  



이 같은 총량의 법칙은 어디에나 적용된다. 사람마다 어떤 방식으로든 타고난 자기 몫의 희비애락(喜悲哀樂)을 다 쓰고 가야 한다는 것이다. 맞다, 맞아! 고개까지 끄덕대며 격하게 맞장구치면서 그래~하늘 본향으로 돌아가기 전 탈탈 털어 원 없이 써봐야겠네, 십 년 묵은 쳇증도 다 가시겠구나. 늙어 주책이야, 소리를 들을망정 기왕이면 용천지ㄹ도 떨어보면 재미지겠지. 여기까지 생각만 해도 비실비실 웃음이 새어 나온다. 아주 통쾌하고 시원스럽다. 어쩐지 속이 뻥 뚫리는 것 같다.



그렇다면 역마살이 낀 듯한 나의 한국행 결심도 어느 정도 명분이 생기고 변호가 된다. 부평초처럼 둥둥 떠서 왔다리갔다리, 나이 들어 멀쩡한 집 놔두고 G랄도 가지가지란 생각이 들지 않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인생은 칠십부터~아직도 내겐 할 일이 기다린다고 마냥 호기롭게 외쳤다. 내 인생 내가 사는 것인데 누가 왈가왈부하며 간섭하느냐. 비켜라, 운명아! 내가 간다!!! 가로 늦게 분 이민 바람에 이어 과연 오늘의 이 선택이 정답일까 의문부호가 따르기도 한다만.

 

그간은 부모, 가족, 이웃들... 나로 인해 삶에 영향을 받게 되는 사람들이 먼저 떠올라 행동 옮김이 주저되곤 했다. 그렇게 누구나 인생에 대한 무게감을 느끼면서 책임 다해 성실하게 또 흐트러짐 없이 살아야겠다는 작정을 하게 되지 않던가. 이처럼 스스로 절제도 했고 외부의 제약 역시 수없이 따랐다. 당연히 내 뜻대로 자유롭게 살 수만은 없었다. 일탈이나 방종이 아닌 내 의지에 따른 내 삶의 운영(運營), 그리고 나 자신 주격이 되어 조정할 수 있는 삶이길 원했으나 결혼과 동시에 내려놓아야 할 꿈이었다. 나이 든 이제는 그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새옹지마(塞翁之馬) 고사처럼 좋은 일이 생겼다고 희희낙락할 것도 아니었다. 세상사 모두가 결과의 좋고 나쁨을 액면 그대로 수용할 수도 없다. 세칭 성공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라도 불운한 때가 있었고, 한평생 불우한 것 같았던 사람도 행복했던 시기가 있었다. 유사 이래 영원히 이어지는 행복과 불행은 누구에게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초년고생은 사서 하라는 말도 있는 반면 초년 성공을 인생 3대 불행의 하나로 꼽는 이유, 근자 들어 크게 문제가 불거진 승리라는 젊은 가수를 보면서 실감했다. 탄탄대로 잘 나간다고 시건방 떨며 주어진 행운이 끝 모를 줄 알고 세상 우습게 여겼다간 큰코다치는 법. 잘난 척 너무 설치며 G랄 떨다간 인생 한방에 가면서 엉망으로 망가질 수도 있다. 나를 비롯 누구라도 삶의 자세는 늘 진중하게, 따라서 경거망동은 절대 금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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