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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02. 2024

안녕! 아기 고사리들아

고사리 채취 삼매경


태반에 깃들면서부터 철이 들었나 봐요.


아기 머리 쏘옥 솟아나자마자


공손히 경배드리는 고사리.


하늘에 대지에 바람에 이슬에


땅속 포실하게 적셔준 빗님에게


삼라만상 모두모두에게 감사하다며


합장배례 고개 숙인 고사리 순.


뽀야니 보송보송 솜털에 싸인 고 어린 새순


매정스레 차마 꺾기 저어 되지만요.


저를 데려가 주세요, 나서듯이 눈에 선뜻 띄는 고사리.


톡 톡 분질러질 때마다 비명 대신


고사리는 명료하게 스타카토 찍네요.


매우 경쾌한 음표로요.


물방울 튕기듯 말갛고도 깔끔한 폴카 스텝 닮은 소리랄까요.




방수처리 안 된 등산화 이슬에 젖어

축축하게 젖은 발.


장화 대신 등산화라도 신어야

진드기나 쐐기, 겁나는 비암 피하거든요.


그럼에도 요사이 고사리 따러 가는 재미에 푹 빠져 지내고 있어요.


얼마나 먹자고 생고생하느냐고요?


원래 고사리라면 비빔밥에 든 고사리도 골라내는 식성이거든요.


고사리 고유의 비릿한 내음이 거슬려서이지요.


그렇다면 부업으로 뛰느냐고요?


에이~돈독이 오를 나이는 벌써 지났잖아요.


푸드득 꿩 날아오른 언저리에서 섬휘파람새 해맑게 노래하고요.


힐링이 따로 있나요.


그 시간이 바로 삼매에 들어 무아지경 노니는 때라네요.


봄비 실비 살몃 내린 이튿새벽이면요.


몽유병자처럼 안개는 뭉텅이로 숲을 배회하고요.


이런 때가 고사리 채취하기에 최적 타임이라데요.


키 부쩍 돋운 오동통한 햇 고사리가 고물고물.


사방 어디나 지천으로 올라오는 고사리 햇순.


들로 아예 산판 전체가 고사리밭 같지요.


불그죽죽 묵은 고사리대 건초더미처럼 쌓인 근처면 틀림없어요.


햇볕 잘 드는 양지쪽 비옥한 토양이라면 고사리는 쑥쑥 자라지요.


목초지나 무덤가에 그래서 고사리가 많은가 봐요.




고사리 꺾기는 중독성이 은근 있더라고요


톡톡 끓기는 손맛에 빠지면 새벽잠 자동 반납하게 되거든요.


순전히 재미져서이지요.


게다가 몇 분에게 선물했더니 너무도 좋아하시는 거예요.


손수 고사리 채취해서 직접 삶아 정하게 말렸으니 얼마나 귀한 거냐면서요.


그 맛에 또 진진한 묘미를 느끼게 되더군요.




고사리 허리 짬에 손이 닿을 즈음이면 어느새


풀숲 잽싸게 서치라이트처럼 훑는 시선. 


동시에 인근 순식간에 스캔을 뜨지요.


그렇게 고사리 꺾는데 몰두하다 보면요. 


무념무상, 아예 선의 경지에 들게 되더라고요.


기도 붙잡고 앉았어도 온 동네방네 헤매는 뭇 사념인데 말이지요.


어쩌면 그리도 머리 말갛게 비워지는지 신통하더라니까.


대기권 그 너머처럼 고요히 텅 빈 그런 느낌?


한번 맛들리면 다시 또 오지 않곤 못 배겨.


무심결에 꺾고 또 꺾고... 고사리에 눈 어두워 고사리만 좇다 보면요. 


신춘頌 부르며 새로 핀 제비꽃 할미꽃 자칫 놓칠 뻔했다니까요.


고사리를 일러 산에서 나는 쇠고기라 하더군요.


반면 고사리가 무성히 자라는 지역은 흉지라느니,


고사리가 귀신을 부르는 음식이라 제사상에 오른다느니,


심하게는 고사리를 먹으면 남정네들 정력을 약하게 한다느니,


더 심하게는 고사리에 발암물질이 많이 들어있다느니,


부작용을 낳는 식품이라는 오해를 자주 받는데요.


발암물질은 충분히 삶는 과정에서 자연 해소된대요.


외려 성질이 차서 열을 식혀주는 효능도 있다네요.


섬유질과 단백질 함유량이 높은 건강식품이지만, 


태양인 소양인에겐 맞겠으나 소음 체질에는 적합하지 않겠군요.


아마 그래서 생래적으로 고사리를 별로 즐기지 않았나 봐요..



어제부터 진종일 비가 부슬거리더군.


사월마다 제주엔 고사리 장마가 든다더니 그런가 봐요.


​새벽 여섯 시 무렵 고사리밭에 도착했는데요.

산자락 따라 안개가 보얗게 밀려내려 왔어요.

안갯속에서도 고사리 자태는 유독 도드라지게 눈에 띄더라고요.

톡. 톡. 톡! 어린 고사리 순을 꺾기 시작했지요.

처음엔 갓 나온 새 순을 분지르는 그 행동이


 모지락스럽고 야멸차게 여겨지기도 했지만요.

이젠 오히려 고사리가 어서 따달라고


고개 디미는 거 같기도 하더라고요.

어느 고사리는 손도 대기 전 목장갑에


살짝만 스쳐도 똑 부러져 버리더리는데요.


어차피 손바닥 활짝 펴지면서 쓸모없이 세어버리기 전,


어떤 미식가를 위해 차라리 제 한 몸 소신공양 바치리라.

혹은 지글지글 고기 불판 곁에 나란히 누워


누군가의 젓가락에 들려 기호식으로


산화하리라 작정이라도 한 듯이요.


고사릿대 가을 되면 하릴없이 누렇게 시들어


 낫으로 베어져 퇴비로 쌓이는 것보다는


 본디 가치가 승하는 게 아닐까도 싶고요.

예로부터 정갈한 젯상 제물로 올려지거나


명절 나물로 괴임 받는 고사리지요.

그만한 대우라면 미상불 그리 억울치는 않으리라 여겨져요.

자연의 모든 음식 재료는 절이거나 삶거나


데쳐져 생명의 기를 잃는듯하지만요.


그렇게 타자의 몸속에 스러지므로 그 자신

에너지로 되살아 나니까요.

이는 인간 위주의 야박스럽고 지나친 아전인수일지도....


아무튼 억척 할망 아픈 허리 잠시 펴볼


짬도 없이 내동 엎드려 신들린 듯 일일이 꺾어 담는 고사리.


할망들 고사리앞치마 수북해지는 만큼, 


통증 클리닉에 갖다 바치는 돈 정비례하건만 아랑곳하지 않아요.


지척 가늠 안 되게 안개 자욱한 이 아침도


한라산 어느 기슭 키 돋워가는 새밭에서 고사리들 꺾고 있을 테지요.


사월 접어들자 숱하게도 고물고물 솟구치며


굵어지는 대궁, 지금 한창 제철인 고사리.


어쩌다 한두 번은 재미지나 몇 시간 계속


허리를 구부렸다 펴는 게 보통 노역이 아니겠더만요.


만일 이 황금 같은 봄 한철 고사리 채취 일삼아하라면?


노댕큐!


나 정도 억척으론 체력으로 보나 따나 물론 불감당,


제주 여인네들 강인한 생활력에 진즉 두 손들고 말았다니까요.


야생의 섭리대로 이미 잎이 펴 세어버린


고사리들 너울너울 펼쳐진 한라산 자락.


눈에 스며든 싱그러운 연둣빛 물결로


안구정화하고 고사리밭 미련없이 떠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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