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스로 공항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한 일은 시계를 뒤로 돌리는 일이었소. 덤으로 얻은 여덟 시간, 어쨌거나 흐뭇했소. 여행 중의 시간이야말로 밥 먹는 잠시도 아까울 지경인데 여덟 시간의 보너스라니 생광스럽지 않을 수 있겠소. 더구나 일본 혹은 동남아도 아닌 머나먼 땅 유럽이 아니오.
무더위가 한고비를 이룬 칠월임에도 밖은 초가을 같은 기온에 회색 하늘 묵직이 내려앉아 있었소. 아카시아며 미루나무 아름드리 가로수가 줄 이은 도로를 달릴 때는 간간 듣는 빗발이 동행했소. 말로만 듣던 전형적인 영국 날씨와 첫 대면하는 것도 괜찮은 기분이었소.
전통 유지를 고수하는 보수적인 국민성을 지닌 영국인들은 백 년 전의 비좁고 낡은 길조차 현대적으로 고치거나 바꾸는 것을 원치 않는다지요. 도시를 새롭게 만드는 일 따위도 영국은 결코 할 생각이 없다는군요. 스치는 거리의 건물 거의가 나지막한 2. 3 층들로 석회석과 섞어 지은 요크 나무집이거나 회홍색 벽돌집이 주종을 이뤘더이다. 짙푸른 숲과 어우러진 그 풍경들은 말 그대로 그림엽서 같았소. 집집마다 뜰에 분홍 장미를 가꾸고 발코니에 장식한 제라늄 베고니아 화분들이 또한 감탄을 자아내게 했소.
런던 시내는 비에 젖어 있었소. 바바리 차림의 사람들도 더러 눈에 띄었소. 우중충한 날씨가 잦은 까닭에 밝은 표정을 갖기 위해 선택했다는 빨간색의 이층 버스가 누비는 가로. 질서 의식이 몸에 배어 있다는 얘기와는 달리 붉은 신호등이 켜져 있어도 유유히 길을 건너는 사람들에 놀랐더이다. 헌데, 여기는 철저한 보행자 우선주의에 차들도 크랙션 소리를 내는 경우는 거의 없었소. 삼백 만에 이른다는 자동차 보유 대수에도 불구하고 교통 전쟁은커녕 별 혼잡 없이 큰 강물로 여유 있게 흐르는 차의 물결. 거기에서 자동차 문화의 수준도가 가늠 됐으며, 무엇보다 주급 등에 떠밀리지 않을 만큼 안정되이 보장된 복지제도가 부럽기도 하였소. 또 하나 부러운 것은 근엄하고 정중한 도시 전반의 분위기 자체였소.
긴 시간 비행의 여독도 아랑곳 않고 빗속에 대영 박물관의 이집트 미라들과 만나고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제독과도 악수를 나누었소. 오른쪽 눈과 팔을 전쟁에서 잃은 넬슨은 왼손뿐이었지만, 높은 기념비 위에 당당히 서서 런던 시가를 굽어보고 있었소. 프랑스와 스페인의 연합 함대에 맞서 싸운 트라팔가 해전에 승리하여 당시 노획한 무기를 녹여 만들었다는 네 마리의 사자상이 옹위하듯 지키고 있는 넬슨 동상. 그 앞의 분수는 영원히 해가 지지 않는다던 영국을 상징하는 양 힘차고 웅장했소. 누란의 위기에서 나라를 구한 점에 있어 우리의 충무공과 비견되는 넬슨은 나폴레옹의 영국 상륙을 막아냄으로 영국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영웅으로 기록되었다 하오.
영국이 아끼는 또 한 분의 위인이라면 응당 윈스턴 처칠이 꼽히겠지요. 이십 세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군인이었던 윈스턴 처칠의 작은 흔적이라도 읽을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런던. 승리의 V자형 손가락 표시와 함께 시가를 물고 있는 그대 모습이야 영국의 상징이듯 낯익은 것이 아니겠소. 그러나 템스 강변의 국회의사당 장엄한 고딕 건물과 빅벤을 보면서도, 다우닝가 1번지를 돌면서도 그대와의 연결점은 쉽게 찾아지지 않았더랬소. 하긴 어마어마한 규모의 건축물과 대리석 정교한 조각들에 압도당해 입 벌린 채 사진 찍기에만 여념 없었으니까. 그러다 웨스트 민스터 사원에 이르러 정문 초입에 새겨진 그대 이름 발견하고 잠시 묵상에 잠겼었소.
잘 알려진 대로 웨스트 민스터 사원은 역대 국왕의 대관식이 치러지는 곳이자 명사나 위인들의 영묘가 자리 잡고 있는 영국인들 신앙의 지주라 하더이다. 왕과 왕비는 물론 뉴턴, 다윈, 베이컨, 리빙스턴 등이 본당과 회랑의 대리석 바닥재 아래 안장되어 있다는 웨스트 민스터. 영국인으로 여기 잠드는 영광이야 누구나 바라는 바 아니겠소. 그 빛나는 자리, 영예로운 전당에 거룩한 성가와 기도 소리에 묻혀 영면하는 그대 윈스턴 처칠.
항상 여유로운 미소 잃지 않으며 용기, 정직, 충성으로 일관했던 그대 생애는 곧 근대 세계사와 깊이 연관돼 있었소. 양대 세계 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인으로 영국의 안전은 물론 서방 자유 국가의 평화를 위해 공헌한 그대 불면의 공적을 기리는 사람들이 많은 걸로 알고 있소. 그러나 그대가 루스벨트 및 스탈린과 머리 맞댄 얄타 회담으로 한반도 분단의 계기였으니. 그렇게 38도 군사 경계선이 결의됐음을 상기하면 내 어찌 덮어놓고 존경을 바칠 수 있으리오. 하지만 스스로의 힘을 키우지 못하고 외세에 어깨 기댈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무능과 못남도 쓰리지만 인정해야 할 일이오.
정열적인 웅변으로 전쟁에 지친 영국 국민들에게 용기와 자신감을 북돋워 준 그대는 분명 영국의 자긍심이었소. 또한 ‘책이 당신의 친구가 되도록 노력하라’고 말했던 그대는 문필가로 노벨 문학상을 받았으며 그림에도 뛰어난 솜씨를 보였다지요. 다재다능한가 하면 자신의 뜻을 소신껏 펼쳐나가는 정치가로 온 국민의 숭앙을 받고 마침내 세계인의 추모 속에 웨스트 민스터에 영면한 그대. 지금도 뒷모습 든든한 거인으로 남은 그대야말로 드물게 축복받은 삶을 산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닌가 싶소.
그대가 누운 웨스트 민스터는 웅장한 첨탑 사원의 규모 그대로 천장 드높았고 어둑신한 실내에 유독 돋보이던 스테인드글라스가 보석 같았소. 그곳은 희망과 사랑, 밝음과 따뜻함을 기원하며 수많은 사람들이 봉헌 올린 촛불의 아름다운 일렁거림으로 오래 잊히지 않을 것 같다오. <월간 북한·9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