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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7시간전

첫눈 맞으며 그랜드 캐년 가던 날

그랜드캐년으로 향하던 날이다.

청명한 오후에 길을 나섰다.

딸내미가 금요일 근무를 마치고 우리를 데리러 온 시각은 세시 반.

러시아워와 맞물려 대도시 LA를 벗어나는 데만도 무려  시간이나 걸렸다.

철도 교차점으로 물류 교류의 요지라는 바스토우를 지나자 기나긴 꼬리를 문 화물열차가, 사막도 황무지도 아닌 막막한 대지를 달려가고 있었다.

시선 둘 곳이라고는 소실점 저끝 머나먼 지평선 뿐.

오후 잔광 스러지자 금세 어둠이 에워쌌고 황량스러운 들판 한가운데서 밤을 맞았다.

저녁은 차 안에서 준비해 온 유부초밥으로  대신했다.

어쩌다 불빛 초롱한 마을은 후딱 스쳐지날 뿐 가도 가도 칠흑같이 사위는 깜깜했다.

주유도 하고 화장실에 가기 위해 가스스테이션에 들렀는데 네바다주 개스가격은 LA보다 월등 낮았다.

우리는 라플란까지 가서 하루 쉬고 다음날 일찍 캐년으로 들어갈 계획이었다

보통 라스베이거스를 경유해 캐년으로 가지만 마침 음력 보름과 겹치는 시기라, 콜로라도 강변의 라플란에서 '콜로라도의 달밤'을 음미하기로 하였다.

90년대 초에 들른 기억의 잔상, 그땐 강가의 달빛보다 붉은 대지를 배경으로 지는 노을빛이 더 아름다웠다.

굽이쳐 캐년을 감돌아 여울지는 콜로라도 강줄기는 캘리포니아, 애리조나, 유타주州 경계를 이루며 흐른다.  

로키산맥에서 발원한 이 강은 캐년 협곡을 장엄하게 빚으면서  2천여 킬로를 서진하는 기나긴 여정 끝에 태평양에 이른다.

붉은 강이란 뜻의 콜로라도 강물은 무려 열여섯 개의 댐을 거치는 동안 흙탕물 앙금이 여과돼 맑은 물로 변하게 된다.

중 한 곳인 파커 댐의 물은 산과 사막을 건너 400㎞ 이상을 달려 LA에 이른다.

시에라산맥 설악이 제공한 눈 녹은 물만으로는 부족한 LA가 콜로라도 강물을 끌어와 식수와 농업용수로 사용하니 곧 생명수인 셈이다.

대역사가 펼쳐진 이면의 가벼운 흥밋거리 하나.

라플린이란 이름의 카지노 대가가 어느 날 경비행기를 타고 콜로라도 강변을 지나게 되었다.
순간, 전기 쐬듯 찌릿한 생각이 떠올랐다.

라스베이거스에는 강이 없으니 콜로라도 강변에 호텔을 지었야겠군!
그 후 콜로라도 강을 중심으로 카지노 호텔들이 들어서며 오늘날과 같은 미니 도박도시가 형성되었다고.

라플란에 닿았을 때는 자정이 가까웠다.

지붕 위 높다니 서있는 서부의 카우보이, 오색 화려한 불빛 아래 서부의 개척자 상이 기다리는 프런티어호텔.

체크인하려니 역시나 도박도시답게 카지노장과 연결돼 있어 연기 자욱한 안쪽을 잠깐 힐끔.

여기서 하룻밤 머문 후 내일은 애리조나로 진입한다.

라플란은 네바다주였다.


새벽같이 일어나 행장을 수습하고 캐년으로 향했다.

변화무쌍한 일기도, 날씨는 종잡을 수 없었다.

아무튼 수상쩍은 구름장이 모여들었다 흩어졌다를 거듭했다.

시시각각 기상천외로 변모하는, 요상스러운 날씨란 날씨는 다 총집합시킨 만물상 같았다.

잠시 쾌청한 듯 싶다가도 금세 표정 바꾸는 하늘.

윌리암스에 이르자 시커먼 하늘에서 빗발마저 성성하게 내렸으며 바람결 심했다.

비구름에 갇혀 이러다 그랜드캐년 언저리조차 구경도 못하는 거 아냐?

부질없는 걱정인 줄은 알지만 내심 은근히 신경이 쓰였다.

왜냐하면 나야 수차례 와본 캐년이지만 여행을 즐기지 않는 요셉은 초행길 아닌가.

애들 소풍 가듯 장엄한 캐년을 마주한다는 기대감에 부풀어 있는데 날씨가 도와줘야 하련만.

가족끼리 멀지 않은 곳을 다녀오는 건 괜찮으나 강박적으로 화장실 사용을 해야 하는 요셉인지라 단체로 가는 패키지 버스투어는 언감생심이다.

그러니 이번에도 여러 캐년을 둘러볼 수 있는 그랜드서클은 무리라 단지 그랜드캐년만 방문지로 삼았다.

이제 다 왔나? 다 왔나? 를 연타로 물으며 창밖만 내다보던 요셉.

아직~ 그 와중 난데없아 희끗대는 눈발에 대꾸를 삼키고 말았다.

흐렸다 개였다를 쉴새없이 반복하더니 드디어 푸석푸석 눈흩날리기 시작했다.

차창을 열고 그렇게 올 들어 첫눈을 영접한 우리.

눈 또한 변화 다채로워 풀풀 날리다가, 폭설로 퍼붓다가, 투다탕 우박으로 변하며 온갖 조화를 부렸다.

먼데서 간간 우렛소리도 들려왔다.

캐년 초입 격인 카이밥 내셔널 포레스트에 이르자

목화송이처럼 탐스런 눈발이 쏟아져 우리는 갓길에 차를 대고 눈송이를 두 손으로 받아 모셨다.

그때 숲 언저리에 모여든 엘크떼가 유유히 눈을 헤쳐가며 풀을 뜯고 있었다.

평화로운 대자연의 풍광에 취해 우린 잠시 궂은 날씨에 대한 염려조차 잊었다.

그래, 장엄한 그랜드캐년의 위용도 선물처럼 이렇게 보여주시겠지.

저만치 푸른 하늘이 드러났고 그랜드캐년 입구를 통과할 즈음엔 다시 눈이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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