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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03. 2024

화잇가운 신드롬

혈압

2월 초였다.

요셉의 한인 주치의를 새로 정하러 함께 닥터 오피스를 찾게 되었다.

병원에 가면 의례적으로 혈압부터 잰다.

엉겁결에 나까지 하얀 방으로 딸려 들어가 팔을 내밀었다.

딴에는 태평스레 간호사가 끼워주는 혈압측정기를 팔에 둘렀다.

한쪽을 재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왼팔 소매도 올려보라고 했다.

그때까지도 천연스럽게 팔을 뻗고는 낯선 실내를 휘휘 둘러보았다.

혈압이 높군요, 156에 88인데요.

설마요, 그럴 리가 없어요, 한 번도 혈압이 높았던 적 없고요, 오히려 저혈압 염려를 했더랬는데요.

간호사는 사무적인 어투로 의사 선생님 오시면 다시 한번 체크해 보세요, 했다.

고혈압은 140/90mmHg 이상, 저혈압은 90/60mmHg 이하를 말한다.

고혈압은 뇌와 심혈관계 질환 같은 합병증을 유발, 치명적인 뇌졸중이나 심장마비의 원인이 된다.

혈압이 심하게 낮으면 손발이 차가워지고 식은땀과 구역질이 나며 어지럼증, 의식장애를 일으킨다.

잠시 후 주치의인 내과 의사가 들어왔다.

컴퓨터를 켜길래 전 여태껏 혈압이 높은 적 없는데 고혈압이라네요?

의사는 나이 들면 혈관도 늙어 탄력이 떨어지며 혈압이 올라갑니다, 일단 다시 한번 재보죠.

하고는 혈압계를 내 팔에 끼우고 조이더니 공기를 주입했다.

이번엔 청진기까지 동원해 혈압계 아래 팔뚝 여기저기를 대보며 아주 높은데요, 160에 92인걸요, 했다.

이 정도 수치면 약을 드셔야 합니다, CVS에 들러 가세요, 라면서 곧바로 고혈압 약 처방전을 써줬다.

눈물이 핑 돌 만큼 기가 막히고 황당하면서도 어이가 없었다.

가족력이 있나, 과체중이길 한가, 평소 생활습관이나 먹는 음식을 보나따나 혈압 높다는 게 말이 안 됐다.



수축 혈압(收縮血壓, systolic pressure)

이완 혈압(弛緩血壓, diastolic pressure)

높은 수치가 수축 혈압이고 낮은 수치가 이완 혈압이다.

미 심장학회의 지침에 따르면 고혈압 진단 기준은 140/90㎜ Hg 이상에서 130/80㎜ Hg 일 경우다.

의학적으로 보다 중요한 것은 이완기 혈압으로 90 이상이면 고혈압 환자로 분류된다.

95 이상이면 약물 투여와 같은 적극적 치료가 필요하다.

병원에서는 동시에 혈액검사를 받으라는 의뢰서를 써주었다.

심장 기능 검사, 갑상선 호르몬 검사, 경동맥 초음파 검사 예약 일정표를 내줬다.

의료 영어를 알 턱이 없어 즉각 예약표마다 사진 찍어서 아들한테 전송했더니 내용을 설명해 줬다.

걱정 마시고 검사는 받아보세요, 아니면 봄에 한국 나오시던지요, 했다.

제 몸 누구보다 자신이 정확히 안다 싶어 돌아오며 당연히 의사 처방 무시하고 혈압약은 그냥 패스해 버렸다.

시간을 두고 면밀히 체크를 해보고 난 연후에 복용해도 늦지는 않을 터였다.

딸내미도 통화를 하면서 좀 더 두고 보자며 약 복용 미룬 건 잘 한 결정이라고 했다.

집에 와서 혈압을 재보니 110에 74가 나왔다, 그럼 그렇지.

암튼 병원 길 안내자로 앞장선 나는 이후 졸지에 환자가 됐고 정작 그날의 주인공 요셉은 아무 문제가 없었다.

그때부터 건강염려 증세인 질병 불안장애(IAD)로 딴에는 제법 심각해졌다,

조석으로 혈압체크를 해 기록해 뒀다가 열흘마다 아들에게 보냈다.

혈압은 지극히 정상이었고 아들은 화잇가운 신드롬이네요, 웃으며 그랬다.

'White coat syndrome '은 흰 가운을 입은 의료진만 보면 긴장해서 혈압이 올라가는 현상을 말한다.

집에서는 정상이다가 병원만 가면 과민해져 상승하는 혈압.

일반인들 가운데 20% 정도가 이런 증상을 보인다고 한다.

병원이 익숙지 않은 사람일수록 의료진 가운만 봐도 긴장이 되며 혈압이 올라간다나.

이런 심리적 현상은 주로 여성이나 마른 체질을 가진 사람한테서 흔히 나타난다고.

미국살이 17년에 미국 병원 한번 가본 적 없는 데다 비쩍 마른 사람, 딱 내 케이스에 적용되는 문구들이었다.

거기다 가족들 역시 두루 건강해 병원 신세 질 일이 없었기에 그만큼 병원은 낯선 곳이었고.


한 달 후인 검사 예약일,

가급적이면 슬쩍 지나쳐버릴 생각이었으나 날짜가 다가오자 찝찝하고 꺼림칙해서 약은 안 먹더라도 혈액검사는 받기로 했다.

아무 이상 증세는 없으나 고혈압은 원래 특별 증상이 없다 했으니, 은근 신경이 쓰이지 않는 바 아니었다.

겉으로 내색은 안 했지만 내심 고혈압이란 단어가 무지근하게 압박해 왔다.

혈압은 건강지표 1호로 꼽힌다.

한국인의 사망원인 첫째라는 뇌혈관과 심장질환의 가장 중요한 소인은 고혈압에서 비롯된다.

혹시나 모르니 만사 불여 튼튼이거늘 눈 꾹 감고 이참에 혈액검사를 받아보자.


요셉은 콕 지르면 되는 혈당검사도 기피할 정도로 주삿바늘을 나보다 더 무서워한다.


플루 접종도  안 받는 우린, 둘 다 주사 맞는 걸 극히 두려워할 뿐 아니라 옆에서 보는 것조차 겁을 낸다.


하는 수없이 호명하는 간호사를 따라 주춤거리며 혼자 검사실에 따라 들어갔다.

날 잡아 잡수~ 하듯 팔을 척 내밀고 있다가 끝났어요, 하기에 눈 떠보니 피를 세 대롱이나 뽑아놨다.

어찌나 깜쪽같이 기술적으로 아프지 않게 채혈을 했는지 감탄할 정도라 굳 잡~하며 엄지 척을 해줬다.

그날 난생처음으로 가슴에 크림 같은 걸 바른 다음 초음파 심장 기능 검사라는 것도 연달아 받았다.

미국 병원은 차례 기다리다 지레 죽는다더니 다시 한 달이 지난 후.

양쪽 목에 컴퓨터와 연결된 봉을 둥글둥글 돌려가며 경동맥 초음파 검사도 받았다.

4월 중순에 일괄적으로 검사 결과표 카피본을 내주면서 의사는 다행히 모두 정상입니다, 했다.

한국 가는 길에 종합 건강검진을 받아보려 한다니까 여기서 다 받았는데 이중으로 뭐 하러요?

의사는 오히려 반문을 하며 빤히 쳐다봤다.

사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심란스레 오만 잡념에 빠져 은근히 겁먹고 쫄았었다.

순간 심신 공히 해방된 기분이 들며 창공으로 날아오를 듯 가뿐해졌다.

아들 역시 검사 결과를 어보고 혈당 정상, 적혈구 정상, 콩팥 기능 정상, 콜레스테롤치 정상, 빈혈 없는 최적상태라 하였다.

지금처럼 생활하시면 됩니다,라는 첨언이 따랐다.

괜히 석 달 남짓 은근 쫄아서 맘고생 심하게  했지만(*의료접근성이 좋은 한국에서라면 하루에 끝날 일!) 결과가 좋으니 그저 하늘에 감사 또 감사드릴 따름.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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