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량화 Dec 19. 2024

한라산 천백고지 설국초대


어느 순간 귀가 멍해졌다.


차를 타고 고도가 꽤 높은 천백도로를 오르는 중이었다.


기압 변화로 귀가 먹먹해져 껌을 씹듯 이를 맞부딪자 서서히 고지 적응이 돼갔다.


아직 설경은 펼쳐져 있지 않았고 숲속 그늘에 더러 희끗희끗 눈이 보일 따름.


S자 커브길은 굽이굽이 계속되고 있었다.


차만 타면 멀미하던 유년기 시절이라면 얼굴에 이미 오이꽃 노오라니 피었을 게다.


천백도로는 서귀포자연휴양림과 영실, 어리목 입구를 거쳐 구불구불 한라산 정상을 끼고 제주시와 서귀포시를 잇는 산간 도로다.   


제주도의 멋진 드라이브 명소이자 가장 편히 한라산을 조망할 수 있는 뷰포인트를 다수 품은 산상 도로가 천백도로다.


특히 한겨울이면 눈꽃 새하얀 한라산의 장관을 지척거리에서 접할 수 있으며 눈사람도 손수 만들 수 있다.


굽이진 길 돌고 돌아 자연휴양림을 지날 즈음부터 비로소 설경이 나타났다.


오를수록 점점 쌓인 눈 두터워졌다.


무려 1100 미터 급 고지를 한 발짝도 걷지 않고 가만히 차에 앉아 쉽게 오를 수 있다는 게 신통방통 놀랍기만 했다.


아무려나 한라산 천백고지 휴게소까지 대중교통 편을 이용해 편히 이동할 수 있다니 대한민국 만만세다.  


그것도 칠십 이상이라면 무료 교통카드를 사용, 중문 사거리에서 240번 버스만 타면 간단히 한라산 중턱에 오른다니 꿈만 같다.


한라산에 눈이 많이 오면 대형 버스 외 일반 승용차는 오일육도로나 천백도로 곳곳에서 통행이 금지되고 만다.


해서 이달 21일부터 2월 23일까지는 제주시외버스터미널부터 영실입구를 왕복하는 노란색 '눈꽃버스'가 운행되며 한라산 설경 속으로 안내한다.


길가에 눈 쌓인 영실 탐방로 인근도 이미 도로 양켠에 차량들이 끝모르게 주차돼 있었다.


드디어 설국 눈부신 천백고지에 닿았다.


쉴새없이 밀려드는 차량들, 도로는 차들로 어수선하게 뒤엉켜 있었다.


밖의 날씨는 아주 쌩했다.


머플러를 둥둥 감으며 둘러본 주위 어디나 시야 가득 은빛 설원, 절로 환희심이 샘솟았다.


천지간은 하얀 베일에 싸여 내동 침묵하는데 숱한 탐방객의 환호성만 눈꽃 사이에서 난무했다.


발자국들로 다져진 길은 빙판이나 마찬가지, 여기저기서 자빠지고 넘어지는 사람이 널리다시피 많았다.


눈바람 아랑곳하지 않고 의연히 버티고 서서 백록담 바라보는 백록 조각을 찍다가 스르륵 미끄러졌다.


그제사 아이젠도 스틱도 준비하지 않은 게 슬그머니 후회됐다.



조심조심 길을 건너 덱으로 이어진 습지 자연학습 탐방로에 들었다.


이쪽 길은 눈이 치워져 안심하고 걸을 수 있었다.


구름은 재빠르게 휙휙, 새파란 창공을 보였다가도 금세 뿌옇게 변해 눈발 날리기도 했다.


오랜만에 아니 처음으로 지척에서 접한 한라의 신비로운 설경을 쉬지않고 사진에 담았다.


잿빛 구름장 누리를 온통 휘덮었다가도 잠깐씩 백록담 정상을 말갛게 보여줬지만 육안으로 보다 사진은 이에 영 못 미쳤다.


실제로 근접 촬영을 한 망개 덩굴도, 편백나무도 직접 눈으로 본 순간만큼의 감동은 주지 못한다.


하긴, 사실을 곧이곧대로 기록하는 사진이며 참모습 베낀다는 사진이지만 이 역시 사기이기 일쑤라 전적으로 믿을 수 없긴 하다.


포토그래피라는 이름의 촬영술마저 고도로 발달한 사진 편집기술을 차용해 얼마든지 사진 조작술 가능한 세상이 아닌가.


내셔널지오그래픽지조차 쇼킹한 사진 조작 장난이 있었으며 유수의 신문사 사진기자도 조작 사례가 종종 발각됐으니까.


단지 기록보관용으로 찍는 사진이지만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진기한 정경들을 꼼꼼스레 이리저리 사진에 담았다.


손이 시려 검지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을 때까지 찍고 또 찍었다.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라면 그만큼 열심을 내기란 어림도 없을, 일면 뜻모를 열정이었다.


수없이 눌러대도 기실 그중에 건질만한 건 얼마되지 않지만 그래도 정신 집중해 순간을 포착하는 찰나의 희열을 즐기는 건지도.


습지 탐방로를 결국은 한바퀴 더 돌면서 두 번째는 오롯이 설경 감상에만 몰두했다.  


시선 들어 희뿌연 한라산 정상도 자주 바라봤다.


백설 위에 새 발자국이 난 습지도 한참씩 내려다봤다.


수수만년 제주의 중심이 되어 사계절 늠름히 지켜온 한라의 고독이 문득 사무쳐왔다.


물 마시러 종종종 물가로 내려온 작은 멧새 빠알간 맨발 얼마나 저릿거렸을까 안쓰러웠다.


만물을 지으신 분의 섭리는 거룩하며 그분이 숨을 불어넣은 생명 가진 모든 것은 아름다웁다.


그럼에도 생명 지닌 모든 것 한 생애 견뎌낸다는 게 녹록지 않다는 걸 진작에 알아서일까.


겨울 풍경을 보니 새삼 생명 받아 태어나 사바를 견뎌내야 하는 그 모두 참으로 애연하고 처연스러웠다.


고도가 있어서인지 바람결 점차 얼음처럼 시립고 길옆 나무에 매달린 고드름 끝자락 물기 햇빛에 반사되면서 보석처럼 반짝댔다.


세상 만물은 고요했고 눈에 든 풍경 모두는 그래도 무한 아름다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