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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공원 낙엽송도 노을에 젖고

by 무량화


청명한 날씨이나 기온은 영하 13도.

호수공원은 그날 눈에 싸여있었으며 호수는 온통 꽝꽝 언 빙판이었다.


재작년 인천공항에서 김포공항으로 곧장 연결해 제주행 비행기를 탔더니 어찌나 피곤하던지, 이번엔 일산 언니집에서 며칠 쉬다가기로 했다.


막간의 여유시간, 바람도 쐴 겸 눈 덮인 공원을 보려고 나왔다.


호젓하리라 여긴 공원 안은 쌩하게 추운데도 조깅하는 사람들 의외로 많았다.


오랜만에 들어보는 뽀드득 눈길 걷는 발자국 소리며 아무도 걷지 않은 눈 위에 남겨진 발자취 돌아보는 재미로, 동심되어 여기저기 눈길 걸어 다녔다.

설원에 새겨진 멧새 종종걸음 따르면서 내동 귓가에서 윙윙대는 눈바람 소리며 손끝 시린 맹추위도 잊은 채.

언젠가, 까치 지저귀고 수련 만발해 하루 종일 도연한 기분으로 노닐었던 여기는 일산 호수공원이다.


그러나 지금은 화사하던 장미정원도 버드나무 거느린 정자도 을씨년스러운 풍경인데 반해, 줄지어 선 낙엽송 나목만이 운치를 돋웠다.

하나 더, 이른 봄 샛노란 꽃으로 신춘이 왔음을 알리던 산수유나무, 이번엔 홍보석 같은 열매 달고 기다렸다.



미끄런 길 조심조심 발길 옮기며 천천히 걷다 보니 금세 건너편 숲으로 기우는 석양.

그 빛 반사돼 낙엽송 잔가지에 맥 놓고 스며드는 불그레한 색조.

기운 불끈 솟게 하는 해돋이와 달리 기우는 해는 어쩐지 마음 고즈넉하다 못해 삭연해지면서 심사 묘하게 만든다.

오가는 이 없는 외딴 적소에라도 든 듯하달까.

고도에 홀로 표류해 온 듯하달까.

이는 나이 탓만은 아니리라.

어릴 적 작은아버지네 갔다가도 하나 둘 전등 밝힐 즈음이면 집 생각나서, 밝기만 하면 집에 가리라 다짐하곤 하던 때도 늘상 저물녘이었다.

낮 동안 잘 놀다가 노을 질 무렵 홀연 엄마가 보고 싶어 훌쩍대던 아이, 왜 꼭 그때쯤이면 그랬을까.

무연히 망연히 그저 허심히 한동안 금빛으로 일렁이다 소멸해 가는 노을을 지켜봤다.

찬연한 빛임에도 환희롭기보다 처연한 빛, 곧 사라지고 말 빛이기 때문인가.

사무치게 쓸쓸해지는 이 시간대는 아마 누구라도 기분 착 가라앉으며 절로 사유 깊어질 수밖에 없지 싶다.

그럼에도 밤이 지나면 내일 아침 해는 다시 찬연히 떠오르리니.

떠나온 캘리포니아는 지금 한밤중이겠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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