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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 거점 삼은 일산 호숫가

by 무량화


미국 가면서 서울에서 이틀 쉬었다 가기로 했다.

하룻만에 연달아 날아가는 게 힘에 부쳤기 때문이다.

특히 시차를 겪지 않으려고 일부러 밤비행기를 예약해 두었던 터였다.

청추임에도 수도권 하늘은 눈부시다 할 만큼 청명한 빛깔이 아니었다.

숨길 갑갑할 정도로 희뿌연 채, 새파란 하늘빛을 보기가 어려웠다.

세계의 공장인 중국과 거리를 둔 남녘 부산이나 제주는 그나마 공기가 괜찮은 편이다.

그렇듯 지난번 코비드 사태로 세계가 멈춰 서자 정말로 이탈리아 베니스 수로에 물고기가 돌아왔다지.

인도 역시 사회활동이 전면 정지되며 자취 감췄던 히말라야 설산이 보이기 시작했다지 아마.


호숫가 참나무 근처를 지나는 중에 재잘거리는 새소리가 들렸다.

순간 괜스레 기분이 좋아지며 빙글거려진다.

모처럼 까치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아침나절 집 앞 나뭇가지에서 까치가 깍깍거리면 반가운 기별이 오거나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다.

운수 대통까지야 허황된 사행심리일 테지만 혹시 뜻밖의 무슨 기쁜 소식이라도 들으려나 은근 기다렸다.

반사적으로 까치발 하고 나무 우듬지까지 훑었지만 단풍 든 나뭇잎 무성해서인지 까치는 보이지 않았다.

그래도 까치소리는 가슴 두근거리는 설렘을 부풀게 안겨주었다.

텃새라 한국 어디서나 자주 보이는 까치를 만나면 여전히 마음 따뜻해지고 반갑다.

한편 허풍 심하고 실속 없이 흰소리 잘 치는 사람을 빗대어 '까치 뱃바닥 같다'고 했다.

무슨 뜻인가 했더니 까치의 새하얀 배처럼 말은 그럴싸 백옥 같으나 행동은 정반대일 경우다.

포장만 번지레한 채 겉 다르고 속 다른 표리부동한 인간, 어떤 정치인 같은 언행불일치를 꼬집는 말이다.

하긴 해충을 먹이로 삼는 익조로 알려진 까치이나 파종시기의 농가며 수확기 과수원의 애물단지란다.

그렇지만 한번 새겨진 개념이나 기억은 고정관념 되어 요지부동이다.



나무 솟대가 멀거니 서있는 호숫가 한켠에 연밭이 있었다.

연잎은 눗누렇게 시들었으며 연밥은 저마다 고개 푹 꺾인 채였다.

나르시시스트처럼 물에 비친 제 그림자라도 마주 보려 함일까?

아니다, 연밥은 안에 보듬은 연실(蓮實.蓮子)을 물속에 떨구어 새 생명을 이어가게 하려는 것이다.

단단한 껍질에 싸인채로 생명의 핵을 품고 있다가 바깥 여건이 싹 틔울 만할 때라야 껍질을 깬다.

연실은 열매 가운데 가장 생명력이 뛰어나 천년 이상 흙 속에 묻혀 있어도 썩지 않는다고 한다.

이집트 시대의 연 씨앗이 발아했다는 해외 토픽을 본 적도 있다.

대관절 몇 천년을 기다려온 끝의 대역사인가.

깊이 들여다보면 볼수록 자연생태계의 섭리는 신비롭기 그지없다.

씨방이 너무 단단해 뜨거운 불길에 그을려야만 씨를 터뜨린다는 놀라운 나무가 있다.

송진에 단단히 굳어진 씨들이 불길에 녹으며 드디어 씨방을 연다는 뱅크셔나무다.

경이로운 자연현상 앞에 마주서면 우린 절로 창조주나 조물주를 찬탄하게 되지 않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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