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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12. 2024

먼 빛이 더욱 좋다

그리던 섬이 하나 있었다. 다도해에 흩뿌려진 수많은 섬의 속성, 이를테면 척박한 생존의 터 혹은 특이한 풍습이나 민속으로서가 아닌 수준 높은 문학의 향기를 간직한 그곳. 부용동이란 이름에 연유함인가, 일종의 초월지로 이상향으로 여겨지던 섬 보길도. 시조문학의 백미라는 산중신곡이며 어부사시사에 그려진 자연과 사계의 아름다움으로 하여 가슴에 오래 품어온 보길도다.

 
  주춤거리는 짙은 해무로 땅끝마을에서의 승선이 두어 시간 지연됐으나 늦게나마 뱃길 틔워줌이 고맙다. 벼르고 벼른 보길도행이 무산되는가 애 태웠는데 다행히도 하늘이 깨어나고 물빛은 푸르게 되살아났다. 점점이 스치는 섬들은 저마다 빼어난 자태다. 파도는 순하고 날씨는 쾌청. 노화도에서 다시 갈아탄 철선은 지척의 보길도에 금방 데려다주었다.


  선착장에서 우측 안내도 따라 십여 분 달렸을까. 보길 초등학교 생울타리와 이어진 세연지에 드디어 닿았다. 사진으로 누차 상면한 바 있는 전경인지라 낯설지 않은, 연못이 있는 정원. 제가끔 알맞게 자리한 수석과 송죽 더불어 동백과 느릅이 짙푸른 그늘 드리우고 자귀나무는 부채춤사위 같은 꽃이 한창이다. 밤하늘로 마실 간 달빛을 청하면 오우가의 벗은 다 불러 앉힌 자리에 지금은 터만 남은 낙서재(樂書齋), 곡수당(曲水堂). 서너 송이 수련 오연한 회수담에 온갖 물풀이 빡빡한 세연지는 선이 아주 자연스럽다.

 
  그 환경이 그 작품을 만들어 낸다 하였다. 여기가 바로 고산 문학의 산실이다 싶으니 자못 동계마저 심해진다. 몸과 마음을 맡긴 자연 속에 스스럼없이 동화되고 도취되어 서정 어린 절창을 연달아 토해낸 곳. 그는 고적한 만년을 풍류로 달래며 세상 부귀영화는 짐짓 외면하려 했을까.

 
  앞서 들린 해남 연동의 윤선도 유적지에서 살펴본 고산의 자취를 되짚어 본다. 알렉산드르 뒤마의 생가에는 친필 원고가 색 바랜 채 남아 있다고 들었다.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쓴 책상이 아직껏 정정히 보관돼 있다는 걸 부러워한 적이 있는데 삼백육십 년 전 고산의 육필과 만난 감격이라니.

 
  그곳 유물 전시관에는 산중신곡 친필가첩(親筆歌帖) 외에 나라에서 하사한 물목을 적은 은사첩(恩賜帖), 몇 종의 교지와 노비문서 등이 보존돼 있었다. 선조 20년에 태어나 스물다섯 나이에 이미 진사시에 합격하여 벼슬길에 오른 고산. 이후 봉평과 인평대군의 사부를 지낸 반면, 치열한 당쟁의 와중에서 세 번의 귀양살이를 겪는 등 영욕이 점철된 파란의 생애를 보낸다.

 
  시대가 부르면 나아가 임금을 보필하고 시운이 버리면 물러나 산촌에 은거한 전통 유교 사회의 선비였던 윤선도. 그는 가사문학뿐 아니라 지리와 의약에도 탁월한 식견을 보여 양산 죽성 마을에서 유배생활을 할 당시는 근동에 의원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한다. 병자호란에 패해 왕이 강화로 파천하자 고향 젊은이들과 노복 모아 인조를 호위하고자 강화도로 가다가 왕의 항복 소식을 접하고 세상을 버리기로 작정, 제주로 향하던 도중 보길도에 머물렀다는 그. 절망과 고뇌로 얼룩진 세간사로부터 영원히 떠날 수 있는 은둔처이자 구원처로 부용동을 택함이었으리.

 
  원래 보길도는 섬 전체가 호남 명문거족인 해남 윤 씨 영지였다고 한다. 태어날 때부터 선민신분에다 가진 자로 위치한 때문인가. 고산이 요즈음 의외의 수난을 겪었다는 소문이다. 일부 편향된 의식을 가진 과격 학생들이 세연지에서 이른바 규탄 시위를 벌였다는 것. 못을 파서 바위 쌓고 나무 심는 등 정원을 조경하는데 많은 아랫사람들이 노역에 부림을 당했을 테니, 말하자면 지배 계급의 부당한 서민 노동력 착취라는 등식이다. 즉 양반 사대부의 풍류 놀음을 위해 애꿎은 서민들을 강제 동원하여 혹사시킨 데 대한 지탄이었던 셈. 화염병과 그물차가 나오는, 해묵어 식상한 화제의 변형판이다.

 
  그 말을 들으며 동시에 떠오른 것은 문화혁명 당시 봉건 잔재의 반동으로 몰려 쓰촨 성 성도(成都)의 두보 초당이 훼손당할 뻔했다는 기사였다. 인민은 한 칸의 집을 짓고자 피와 땀을 쏟아 수고하는데 거저 얻은 초당에서 유유자적 시나 읊으며 산 시인을 성토했다는 홍위병. 미관말직에 머물며 한 뉘를 가난과 병고로 고달프게 지낸 두보가 아닌가. 시성(詩聖)으로 추앙받지만 평생을 각고면려한 두보. 평민 시인의 종(宗)이기도 한 그조차 돌멩이 맞는 시국이라면 그건 미친 군중의 사회다. 만리장성이나 피라미드 앞에서도 전제군주의 독재와 횡포를 새삼 시비할 사람들의 한심한 작태만 같다. 유사 이래 어느 시대 없이 신분의 차등은 어떤 형식으로든 있어 왔다. 특히 유교가 지배한 조선 조에는 효제충신(孝悌忠信)의 윤리관이 의식의 근간이었고 상하 계급관념이 뚜렷했던 시대다.



  뛰어난 시가 작품을 남긴 국문학의 거봉이자 왕에게 바른말로 간하는 강직한 지조와 충절의 올곧은 선비였던 고산. 반면 세연정에 앉아 기녀들로 하여금 회수담 내 무도암에 올라 춤추게 하거나 연밥을 따게 하며 물에 비친 은밀스러운 속 그림자를 완상하였다는 얘기도 있다. 저간의 사정은 호란의 뒤끝 어수선한 난세였음에도, 연못에 배 띄우고 도연히 술잔 기울이며 음풍영월로 소일했음이 오늘의 젊은이를 격앙시켰을까.

  뿐 아니라 어부사시사는 어부들의 노동요이나 어로의 즐거움을 체험하고 읊은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전형적인 양반층이었던 고산이 거친 파도와 싸우는 어민의 참모습을 그려낸다는 것은 무리다. 따라서 어촌의 아름다운 주변 경개에 투영된 사대부의 정서일 따름이므로 관념적일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시인은 환영(幻影)을 만들어 내지만 현실을 창조 내지는 개조하지 않는다고 한 플라톤도 있지 않은가.

  지국총 지국총 어사와
  강촌 온갖 꽃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어찌 꽃만이랴. 먼 빛이 더욱 좋기로는 사람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흔히 역사상 위대한 인물은 높직이 올려놓고 범부와는 근본과 격이 다르다는 식으로 윤색하기를 즐긴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의 실상, 허물과 치부까지를 보여주므로 나름대로 이해 해석하고 평가는 각자의 척도에 준함이 마땅치 않을는지. 비록 교과서나 전기에서 만난 고산의 위상이 다소 손상되는 면도 있었으나 적나라한 모습을 통해 오히려 인간미를 느낄 수 있으니까. 자기 자신은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초인이나 성자의 경지를 은연중 그들로부터 요구하는 심리의 근저는 무엇인가. 누구든 성인화 혹은 신격화하여 재구성하지 않는 다음에야 두루 완벽할 수 없는 존재가 인간임에야.

  번다한 생각 접고 바다로 나서니 해풍에 염천이 다시 고개 숙인다. 멀어져 가는 보길도 역시 먼 빛일 때 더욱 좋고 상상 속에서가 한결 운치 있는 섬이었다.   - 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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