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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놀랬잖아

2022

by 무량화


아침나절 딸내미로부터 전화가 왔다.

16시간의 시차가 있으니 늘 그렇듯 퇴근길에 하는 전화다.

간밤 뉴스마다 미 서부가 산불로 온통 난리 났다고 야단이던데 괜찮냐고 물었다.

미국에서 살아보고도 그래? 여름철만 되면 해마다 나는 산불 아냐? 바로 옆동네까지 바짝 다가온 산불로 집에 재티 날아들던 거 기억 안 나?

어이없다는 듯 속사포처럼 쏘아댄다.

과거를 잊은 자에게 역사는 되풀이된다, 란 경고가 있듯이 뼈아픈 일은 물론 심각한 사건도 곧잘 망각하는 우리다.

편리하게도 인간은 지독한 산고를 겪고도 애를 또 낳는 걸 보면 속성상 잘 잊어버리게끔 프로그램화되어 태어난 모양이다.

딸내미 다그침만이 아니라도 전에 올려둔 글을 찾아보니 서부의 산불, 거의 연례행사에 준한다.

몇 년 전 나파밸리가 온통 불길에 휩싸였을 적에도 한국에선 아래와 같은 뉴스 제목이 아마도 뒤따랐을 터다.

'마치 화성처럼 하늘은 주황색, 온통 화염 휩싸인 美 나파밸리!'

특히나 와인 애호가가 넘쳐나는 나라이니 와인 주산지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 화재소식에 발 동동 구른 사람도 적잖았으리라. ㅎ

각설하고, 어제 국내 메이저 언론사의 뉴스 기사 헤드라인은 아래와 같았다.

미 서부 해안 휩쓴 역대급 산불, 화마로 수십만 긴급 대피, 불타는 미 서부, 지구 종말이 닥친 듯, 미 서부 사상 최악의 산불, 미 서부 3개 주 동시다발 산불, 확산일로인 산불 요세미티 위협 등등.

네 시간 전에 내보낸 KBS 뉴스 제목은 '美 서부 산불 12개 주로 확산' 온통 불바다를 만든다던 깡패집단처럼 자극적이다 못해 공포스럽다.

뉴스 기사도 기사지만 더 겁먹게 하는 건 맹렬하게 타오르는 숲과 사방천지가 벌겋게 변한 사진들이다.

꼭대기 사진은 연합뉴스가 전한 샌프란시스코 금문교 모습이다.

저 사진을 보고 나서 안 그래도 미국에 전화하려던 참에 때마침 걸려온 딸내미 전화였다.

샌프란 가까이 사는 조카애 근황은 어떠한지 물어봤더니 엊그제 이사했다며 아파트 사진 보냈는데 잘 지내고 있더라며 걱정도 팔자라고 또 쿠사리.

이번 역시 뉴스 사진에 속아 소심한 사람 놀라서 밤잠 설쳤는데 과도한 스트레스로 불안장애를 입은 정신적 손배는 어디다 청구해야 하나?

아서라, 뉴스고 뭐고 호들갑 떠는 언론매체 과장법에 놀아나지 않으려면 허풍 과한 기사들 무조건 외면하기, 사기도 미끼에 관심 보여야 걸려든다.



서부 캘리포니아 지역에선 계절마다 대형 산불 난리를 연례행사처럼 치른다.

건조기 때면 더 심하다.

몇 해 전에 실제로 겪은 일이다.

LA 북쪽 30마일에 있는 샌타클라리타 지역에서 산불이 났다.

산불은 맹렬한 기세로 번져 앤젤레스 국립산림지를 위협했다.

천만다행히 산불 엿새째인 오늘은 좀 주춤해지며 진정국면으로 들어갔다.

샌드캐년에서 발화해 '샌드 산불'로 명명된 금번 산불.

고온·건조·저습한 환경 속에 시속 30마일의 강풍을 타고 불길은 인근 지역으로 빠르게 확산돼 갔다.

산기슭 벌겋게 달구는 화마에 수백 가구가 집을 버리고 대피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고온과 강풍 속에 지난 24일부터 산불이 북동쪽으로 이동하면서 북쪽으로는 아구아둘세 방면으로, 동쪽으로는 액튼 지역, 서쪽으로는 샌타클라리타 방향으로 산불이 계속 번져 나갔다.

이로 인한 연기가 곳곳에서 솟아올라 80Km 정도 떨어진 이곳까지 재티가 날아왔으며 코를 찌르는 매캐한 탄내가 났다.

검은 연기와 잿가루의 대형 구름이 라크레센타, 글렌데일, 패서디나, LA 다운타운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끼쳤다.

소방당국은 창과 문을 꼭 닫고 있을 것과 어린이나 노약자, 호흡기 질환이 있는 주민들의 야외 활동 자제를 당부했다.

매캐한 냄새와 잿가루는 LA다운타운까지 퍼져나가 글렌데일과 패서디나의 경우 야외 수영장을 임시 폐쇄했다고 한다.

골프장도 부분적으로 문을 닫은 곳이 늘어났다.
산불 현장을 직접 목격한 이웃 주민에 따르면 산기슭에서 기승부리던 불길이 만들어낸 불덩이가 마구 날아다녔다 한다.

한참 떨어진 산 아래 철길을 넘어 14번 도로까지 날아와 임야를 마구잡이로 불태웠다고 한다.

예측불허로 급격히 세력을 키운 산불은 '불폭풍'과 '불폭탄' 현상에 의해 진로 예측이 더 어려웠다.

이번 산불 진화 작업은 다른 산불과 달리 진행 방향이나 속도를 예측하기 어려운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LA카운티소방국은 "덥고 건조한 바람이 강하게 부는데 방향이 자주 바뀌어 예측하기 힘들다."는 브리핑이 나왔다.

"엎친데 덮친 격으로 기온도 높아 소방대원들이 투입된 지 2~3시간만 지나도 지쳐 인력이 부족하다." 고도했다.
이번 산불이 좀처럼 불길 잡기 어려웠던 이유는 고온건조한 기후 조건과 대형 산불만의 특징이 만나 '최악의 조합'을 이룬 때문.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점이 있었다.

험준한 지형에 나무다운 나무도 없이 잡풀만 듬성한 메마른 산악인데 무섭게 대형산불이 번진 이유는?

넓은 면적이 한꺼번에 타면 산불 중심부에는 산소가 부족하게 된다.

강한 연소열로 엄청난 상승기류가 발생해 상공의 산소 유입을 막기 때문이다.

진공 상태가 된 중심부 한 부분에 한순간 신선한 산소가 공급되면 일시에 강력한 '불의 폭풍'이 발생하게 된다.

소방 관계자는 "불길과 불길이 부딪치면 폭탄 터지는 것처럼 큰 굉음과 함께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게 된다"고 원리를 설명했다.

또, 주변 열기와 에너지를 빨아들인 상공의 화염이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해 떨어지면서 불씨를 사방으로 퍼트리게 된다.

하늘에서 '불의 폭탄'이 떨어지게 되는 셈이다.
그간 산불로 통제되는 주요 도로는 샌드캐년과 솔리대드캐년 지점, 샌드캐년과 로스트캐년 등이었다.

14번 프리웨이 북쪽 방면 샌드캐년 근처 산불 특히 기세등등했으나 불길 잡힌 현재는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지고 있다.

남가주지역 통근열차를 관리하는 메트로링크 측은 철로통제에 따라 빈센트 액턴역, 팜데일과 랭캐스터역의 열차운행을 취소했으나 현재는 모두 정상운행 중이다.

LA카운티소방국이 발표하길 27일 오후 현재 진화율 40%를 기록했다고 한다.

진화율 100%라고 해도 이 지역 내 불을 품은 숯덩이까지 모두 제거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언제든지 재발화될 소지는 있다.

다만 소방국이 곧바로 대처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 샌드 산불이 진화 단계에 접어들며 위험한 고비를 넘기자 여늬때처럼 청명한 하늘을 볼 수 있게 되었다.

* 뉴스 매체 사진 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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