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월해안도로를 걸어가던 저물녘이었다.
바닷가 높은 언덕 위에 애월은 항몽멸호의 땅이란 표지석이 높다라니 서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머지않은 산자락에 항몽유적지가 남아있는 애월읍이니까.
동시에 근처에서 얼핏 스쳐 지난 낯선 두 이름이 오래 마음 갈피에 남겨졌다.
성명 석 자가 마치 요즘 젊은이 이름 같다.
아주 한참 전 이 섬에서 태어난, 그러나 두 사람은 아무 연관 없는 인물이다.
똑같이 조선조 정조시대를 살다 갔지만 그들 남녀는 서로 전혀 모르는 사이다.
일면식도 없었던 두 사람인데 애월 해변가 언덕 위에 둘 다 비문이 새겨져 있다.
물론 한 장소는 아니지만 두 석비는 과히 멀지 않은 위치에 자리 잡았다.
<표해록>을 쓴 장한철과 유배객을 사랑한 여인 홍윤애를 기리는 비가 그것.
한국적이거나 제주스럽진 않지만 암튼 눈길 끄는 '사랑의 종탑'은 연인을 지키기 위해 죽어간 홍의녀를 추모하고자 세웠다고.
장한철과 홍윤애의 생애를 좀 더 상세히 알아보려고 제주 역사서를 찾아보았다.
장한철은 영조 때 애월리에서 태어나 정조 때 대정 현감을 지낸 인물이다.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가려고 1770년 겨울에 배에 올랐다.
바다를 건너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나흘 만에 류쿠 제도(오사카)의 호산도란 무인도에 닿아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구조를 기다리던 섬에서 왜구를 만나 죽을 고비를 겨우 넘긴 뒤, 안남(베트남) 상선에 구조되나 한라산이 보이는 곳에서 다시 바다로 내쳐졌다.
그가 탄 배는 표류 끝에 전라도 완도군 청산도에 닿으므로 일행 28명 중 여덟 명만 살아남았다.
배를 타고 본토로 가려다 태풍을 만나 류쿠열도의 한 무인도에 표착한 후 우여곡절 끝에 생환하기까지 4개월여의 과정을, 한지 서른아홉 장에 붓으로 기록한 책이다.
1959년 제주도 종합학술조사단에 의해 발굴된 고서로 당시 애월 상고 교장이던 후손 장응선 선생이 소장하고 있었다 한다.
이 책은 당시의 표류 과정과 생환 과정을 통해 해로와 물의 흐름, 계절풍의 변화 등을 알게 해주는 귀중한 해양지리서의 역할을 하였다.
더불어 백록담과 설문대할망 전설, 류쿠태자에 관한 전설 등이 기록된 설화집으로서의 문헌적 가치도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우리 문학사에서 조선시대 해양지리서이자 해양문학의 백미로 평가받는 <표해록>은
제주도 유형문화재 제27호로 지정, 현재 국립제주박물관에 보관돼 있다.
애월읍 유수암리에는 사랑하는 연인을 죽음으로 지켜낸 의녀 홍윤애의 묘가 있다.
고려 말 정승을 지낸 홍언박의 후예로 제주에 귀양온 선대 때부터 몰락한 가계가 된 홍처훈의 여식으로 태어났다.
그녀가 스무 살 되던 해 이웃한 유배인 조정철의 수발을 들면서 딸을 낳게 된다.
이때 소론인 김시구가 제주 목사로 부임하자 반대파인 조정철을 제거하려는 음모를 편다.
조정철을 옭아매려는 계략을 꾸며 역모죄로 몬 다음 그를 죽을 만치 곤장을 쳤다.
숨이 끊어지기 직전에 내쳐놓은 그를 지극정성 간호해 소생시킨 그녀.
이번엔 그녀를 잡아다 조정철이 임금을 저주하더라는 거짓 자백을 받아내려던 김시구는
피 낭자하도록 태형을 쳤으나 그녀가 끝까지 불복하자 목을 매달아 죽였다.
조정철을 없애기 위해 악에 받쳐 모진 고문을 해도 굴하지 않다가 원혼이 되고 만 그녀다.
해산한 지 두 달 만에 벌어진 비극이다.
후일 조정철은 이때의 정황을
昨日狂風吹大樹 殘花嫩葉落紛紛이라고 새기며 비통해했다.
결국 이 고문치사 사건의 파장으로 당시 김시구는 파직당한다.
그렇다면 조정철은 대체 어떤 사람인가?
노론이었던 그는 1777년 모반사건에 연루되어 제주에 유배당한다.
정조가 집권하자 사도세자를 억울한 죽음으로 몰고 갔던 조정철의 장인 홍지해는 궁지에 몰리면서 정조 시해 모의를 하다 발각된다.
대역죄인의 사위인 그는 그나마 다행히 사형을 면하고 제주 유배형에 처해진다.
시가까지 풍비박산이 나고 남편이 귀양 가자 그의 아내는 자결을 하고 만다.
그렇게 시작된 유배 기간은 제주에서만도 27년간이나 지속됐다.
오랜 귀양살이 끝에 다시 관직에 발탁된 그는 제주목사가 되어 한 맺힌 제주로 왔다.
홍윤애가 죽은 지 31년이 지난 후였다.
그는 홍윤애의 무덤을 찾아 산담을 쌓고 봉분을 단장하였으며 묘비를 세웠다.
언제이고 그녀가 잠든 곳을 찾아봐야지, 하면서 발걸음 옮기다 멈춘 곳.
일몰 풍광 아름다운 애월 한담마을 지나면 불야성 이룬 애월 카페촌에 이른다.
여타 설명 필요 없이 제주에서도 가장 소문난 핫플 죄다 모여있는 애월.
관광객 몰리는 명소도 수두룩하고 별의별 종류의 맛집도 숱하며 분위기 있는 카페가 깔린 곳.
낭만 제주의 랜드마크가 된 애월은 이제 청춘들의 순례지가 되었다.
흘러간 옛 이바구야 당연히 관심도 흥미도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