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의 크로커스처럼 새하얀 눈 속에서 금빛 화사하게 피어나는 설연화(雪蓮花).
복 복(福) 자에 목숨 수(壽) 자, 복수초(福壽草)란 이름의 야생화다.
제주에서는 얼음 언 대지에 피어난다고 얼음새꽃, 눈을 녹여내며 핀대서 눈색이 꽃이라고도 부른다.
입춘이 한참 전이었고 우수 경칩도 지났으니 그렇다면 새봄이 왔다는 꽃들의 신호 들릴 때도 됐지 싶었다.
대기 청명하고 바람 온화한 날씨라 지체없이 한라생태숲으로 길을 잡았다.
일요일인 어제는 사순 첫 주일날이라 미사 참례 후 곧장 성판악 가는 차에 올랐던 터다.
이 기간은 자기 정화의 시기, 금육과 단식을 통해 희생과 극기를 실천하는 사순기간임에도 광야가 아닌 꽃을 찾아 한라산으로 향하는 나이롱 신자에게 꽃의 환대가 임할는지.
생태숲 입구에 민들레인 듯 노란 꽃 몇몇 송이 피어있었으나 거들떠도 안 보고 숲으로 내달렸다.
누런 풀섶 위에 만개해 있는 복수초 꽃을 제주 와서 말 그대로 진짜 매해 푸짐하게 본 터.
생태숲 외에도 붉은오름, 절물휴양림, 사려니숲, 하다못해 도로변 조경용으로도 복수초 흔해졌다.
올해는 매화 꽃그늘 아래 핀 복수초를 진작에 걸메공원에서도 보긴 했다.
그래도 굳이 생태숲으로 오는 이유는 첫 만남의 기억 때문일까, 아니면 은근 장소에 대한 중독성이 있어서일까.
위치를 알기에 곧장 숲 초입의 수문장 같은 연리목 바삐 스쳐 지났다.
그러고 보니 생태숲엔 유독 연리목, 연리지가 흔한 편이다.
애초에 처음으로 얼음새꽃과 조우했던 고로쇠나무와 때죽나무가 한 몸 된 그 장소로 갔다.
아랫녘 서귀포엔 이제 봄꽃 화사하게 피었으나 고지인 여긴 여태도 겨울이 밍그적거리고 있는 까닭이리라.
여리디 여린 풀꽃인 야생화라 양지에서조차 아직도 한껏 움츠린 채 고개 내밀지 못하는가.
연리목 아래 복수초 필 듯 말 듯 엉거주춤, 단지 한 포기만 겨우 배시시 웃고 있었다.
여려빠진 바람꽃이나 노루귀꽃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지 못했다.
꽃이 워낙 작기에 아예 시선을 마른 풀밭에다 고정시킨 채로 숲을 찬찬히 훑었으나 전혀 아무런 기척없이 적막하기만 한 숲.
도대체 하얀색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낌새조차 찾을 길 없었다.
너무 일찍 서둘렀나 보군.
축 처져버린 기대감, 맥이 좀 풀렸다.
입춘 때도 대설이 내렸고 이월 이슥하도록 여전 한라산 윗녘 새하얀 면사포 쓴 날.
얼음새꽃이 하마 폈으려나? 성급히 생태숲을 찾았다가 눈 속 냉기로 된통 독감에 걸렸었다.
근 열흘을 시난고난 몸져누웠다 일어나 보니 유채꽃 수선화 매화 함빡 피어있었다.
그 후 건강이 최우선이다 싶어 몸 사리고 조심했는데, 오늘 아침 삼월 날씨는 간만에 눈부셨다.
경건히 지내야 할 사순시기고 뭐고 쏘다니던 버릇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일기 화창하다는 핑계로 신나게 오일육 도로를 넘었는데 제주 기상도는 변화무쌍하나니.
남쪽인 서귀포와 달리 부드럽던 바람결은 매운 한겨울 북풍으로 변해 버렸다.
하긴 음력 이월 거친 영등바람은 품섶 깊이 파고들기로 소문났지.
자연으로 나와 숲에 들면 마스크부터 벗어젖히는데 슬그머니 마스크를 되썼다.
솔바람은 쏴아 쏴, 나목 가지 휘저으며 윙윙대는 삭풍 시렸다.
청량하게 재재거리는 멧새 소리 대신 고사목 높직한 우듬지에 앉은 까마귀만 깍깍거렸다.
솟대며 갈대 반영 되비치는 연못가 버드나무 눈 도톰해졌으나 물바람 차 수생식물원 대충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
참꽃 봉오리도 탱탱해졌으나 아직 봄은 먼 듯, 한껏 움츠리고 있는 생태숲 빠르게 벗어났다.
차도가 있는 입구께로 나와 아까 본 노란 꽃에게로 다가갔다.
어머머, 너였구나!
미안해, 만개한 널 바로 앞에 두고도 몰라봤지 뭐니.
네가 바로 그 꽃, 내가 그리 찾아 헤맨 활짝 핀 얼음새꽃일줄이야!
산 너머로 파랑새를 찾아다녔지만 파랑새는 항상 우리 곁에 가까이 있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