볼그롱동백에서 메시지가 왔다.
매화꽃이 폈는데 지금 딱 보기 좋다면서 사진 몇 장도 딸려 보냈다.
얼마 전, 분분히 낙화지던 애기동백을 보러 갔다가 동백원 한가운데 조성된 원형 정원에 시선이 멈췄다.
능수버들처럼 가지가 축축 늘어진 나무가 빙 둘러 서있어서였다.
바짝 다가가 나목 끄트머리에 맺혀있는 꽃망울을 살펴봤다.
녹두알보다 작은 딴딴한 꽃망울만으로는 무슨 꽃나무인지 알 수가 없었다.
마침 쥔장이 보이기에 혹시 능수벚나무냐고 물었다.
매화나무라고 했다.
송이송이 꽃을 달고 주렴처럼 늘어져 매화가 피면 다시 올 테니 꼭 연락을 해달라며 전화번호를 주고 왔다.
서귀포 위미리에는 동백낭, 동백수목원, 볼그롱동백 세 곳이 동백꽃 명소로 모리모리 모여있다.
그중 능수매화가 있는 집은 볼그롱동백 한집뿐이다.
어느새 사반세기 전, 미국 이민을 가서 우리가 정착한 곳은 동부 뉴저지였다.
체리꽃이 많이 핀대서 이름이 체리힐이란 동네에서 맞은 첫 봄.
잔디 파란 정원에 스노우드롭 크로커스 히야신스가 피면서 봄이 열리는 미 동부, 곧이어 체리꽃 벚꽃이 피어났다.
그때쯤이면 집집마다 봄꽃이 만발해, 마을 전체가 꽃대궐을 이루기에 웬만한 식물원 부럽지 않았다.
주택가에서 꽃구경을 하다가 어느 날 연분홍 대형 양산을 펼친 듯 낯선 벚꽃나무를 만났다.
한국에서는 그런 벚나무를 한번도 본 적이 없기에 무척 신기하고 진귀해 보고 또 봤다.
나뭇가지에 꽃이 피면 꽃송이는 거의가 하늘을 바라보게끔 돼있다.
종을 닮은 꽃이 아니라면 대부분 그러하다.
그런데 버드나무처럼 줄기가 전부 다 땅을 향해 휘휘 늘어져 있다면?
능수벚꽃은 주렴 형태의 줄기에 화사한 꽃송이를 달고는 봄바람 타고 그네를 타듯 가벼이 한들거렸다.
미국에서 그때 난생처음 본 능수벚꽃인데 이십 년이 지나자 한국에도 대량 퍼져있었다.
생물의 유전 형질을 바꾸는 품종개량 기술이 워낙 발달돼 벼라별 개량종 식물이 다 나오는 요즘이다.
씨 없는 수박으로 상징되던 육종학이 이제는 GMO라는 유전자변형체의 반격으로 지구촌이 몸살 앓긴 하지만.
아무튼 연락을 받자마자 득달같이 볼그롱동백으로 달려갔다.
내일 오전에 가겠다고 답해놓고는 일기예보를 살피자 아침부터 서귀포는 주룩주룩 빗줄기 예고다.
해서 저물녘 늦은 시간임에도 개의치 않고 냉큼 길을 나섰던 거다.
볼그롱동백은 인위적으로 애기동백을 전지해 매초롬하게 다듬기보다 자연 그대로라서 외려 정이 가는 곳이다.
조경이 잘 된 옆집은 동글동글 동백나무마다 단장 완벽해서 성형미인 같다면 볼그롱동백은 순수자연미인.
도착하자마자 한달음에 중심부로 직진했다.
청매와 백매가 새하얗게 피어있었다.
진다홍빛 홍매도 한 그루 새침하니 홀로 돌아앉아 피었다.
지조와 결기로 똘똘 뭉친 이래 봬도 나 매화낭이야, 그래서일까?
야리야리한 버들가지처럼 낭창거리진 않지만 아래로 죽죽 흘러내린 줄기에 다문다문 핀 매화.
역시 매. 난. 국. 죽 사군자의 맨 첫머리인 매화답게 절조가 생명이니 헤프면 안 되지 아암!
매화가 구름처럼 피었더라는 근원수필에 딴지 걸었던 난데, 흐드러지게 피면 그게 매화야?
매화에만 몰입하느라 눈길 주지 않고 지나친 애기동백 어느새 추레하니 끝물인데 섭할 거 같아 급히 몇 장 팍팍팍.
어둠살 퍼지는 볼그롱동백에서 사진 여럿 건져오며 그래도 자못 흐뭇해했다는.
볼그롱동백
서귀포시 남원읍 위미리 89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