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
통도사 들렀다 축서암에 간다.
노송 운치 있는 낮은 고개 접어들면 내처 산촌 길로 십리 남짓한 거리다.
좀 휘휘하나 차 타고 휑하니 지나가기엔 아까운 길이라 걷기로 했다.
나무마다 색감 달리 한 채 연두로 겨자색으로 부푸는 눈엽. 바야흐로 생명 있는 것 모두 푸르게 물오르는 계절이다.
솟구쳐 나는 멧새 지저귐이며 무논에서 와글거리는 개구리소리에조차 신명이 난다.
가다가 길섶에 앉아 네 잎 클로버를 찾는다. 찔레 새순도 쓰다듬어 본다.
미풍에 감겨 오는 싱그러움은 꽃내음인가 풋내인가.
춘홍에 겨워 겨워 도연해지는 기분. 좋다. 너무 좋다.
광기와도 같은 격정으로 달뜨고 열띤 도취에 숨 막힐 것 같은 봄 한나절.
맨발로 왈츠라고 추고 싶지만 대신 발끝 가벼이 나비를 따른다.
몽환적인 꽃구름으로 절정 이룬 벚꽃. 진달래 꽃잎 지는 그 아래 제비꽃 양지꽃이 어여쁘다.
걷기를 참 잘했다.
편리함이나 속도감 따위가 요구되지 않는 이런 때야말로
휘발유 냄새 흙먼지 일구는 차보다 자재로운 두 발이 적격이다.
얼마 전 운전 배울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내동 관심 밖이던 운전인데 어느 날 돌연 결심이 선 것이다.
당장 아쉽진 않아도 운전면허는 이제 거의 필수에 가까운 판이니 돌아가는 세정의 흐름에 마냥 초연할 수 없는 일 아닌가.
또한 나 혼자만이 세월에 뒤처져 살고 있다는 느낌도 한몫 거들었다.
원래 나는 기계 분야에 흥미가 적다.
운동 신경도 둔할뿐더러 간이 작아 운전은 애당초 엄두를 못 내던 터였다.
그러나 하면 된다는 자기최면을 걸며 다들 하는데 못할 게 뭐람, 마음 다부지게 먹고 시도해 보기로 했다.
실기시험 치러 가던 날, 부산 특유의 심한 정체현상에 갇히고 말았다.
요즘 들어 급격히 늘어난 자동차의 폭증량으로 러시아워가 따로 없는 실정이다.
요지부동, 갑갑하다 못해 지겨울 정도로 차가 막힌 것을 보고 아서라 참자 나라도 빠져줘야지 특별한 볼 일도 없으면서,
그 순간 단박 마음을 바꿔버렸다.
오히려 다행 아닌가.
차를 몰 줄 알았다면 걷는 일도 없었을 테고 그러면 이 바람결, 이 작은 꽃잎들을 어찌 만나랴.
하지만 문명의 이기가 지닌 최대 매력인 신속 편리함에 빠져 거기 길들여지고 차츰 기계 중독자가 되는 것도 바람직하지 못하다는 시대 역행적인 내 사고 역시 문제는 있다.
나는 아직 컴퓨터 문맹자다.
수치스러울 것까지는 없어도 분명 자랑거리는 아니다.
한동안 오른손을 다쳐 글씨를 쓰지 못했을 때 일이다.
당시 기계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했으나 다루는 법을 익혀두지 않았으니 컴퓨터는 있으나마나였다.
마땅히 그 존재 가치를 십분 이용할 기회였지만 정작 나는 키 하나 조작할 줄 몰랐다.
프린터기를 장만할 즈음만 해도 내게 꽤 쓸모가 있겠다 싶었는데 맏이의 협조 없이는 무용지물이다.
아이들은 자유자재로 다루는 컴퓨터다.
막상 다급해서 배우려 하니 웬 게 그리 복잡한지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설명에 실습까지 곁들이던 아이는 계속 헤매는 내가 답답했던지 자세한 설명문을 컴퓨터로 작성해 두고 나가 버렸다.
먼저 안정기의 전원을 올리세요 가 일 번, 다섯 번째는 엔터키를 누르면 워드 프로세서를 사용할 수...
더듬거리다 차라리 손으로 쓰는 게 빠를 듯해 아예 덮어두고 말았다.
물론 언제까지 아이에게 부탁할 수 없는 노릇이니 그 기계와 친해져야겠지만 아직은 내 손 쪽이 훨씬 편함이 사실이다.
성취욕의 부족인지 현실 적응치가 낮은 건지 문명 지진아만 같아 한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문명사회인 도회를 벗어나 이렇듯 자연 품에 안기면 저절로 풋풋해지며 행복감에 젖는 나임을 어쩌랴.
더욱이 지천이다 못해 온데 흥건한 봄기운. 미쁘고 사랑스러워 그냥 미칠 듯 좋은 이 자연의 모든 것.
비록 촌스럽고 좀 원시적이긴 하나 이대로 사는 내가 종국의 대차대조표에는 흑자 폭이 크리란 근거 불명의 고집도 갖고 있다.
장 자크 룻소는 이미 16세기에 문명으로 때 묻혀진 인간 구제를 위해 자연으로의 희귀를 주장하지 않았던가.
나는 지금 어릴 적 외가에 가듯 아니 고향 나들이 가듯, 자연에 취해 봄에 취해 흥조 마저 띄운 채 산길을 걷는다. 199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