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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봄의 보리수

1986

by 무량화 Mar 2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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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일까.

강물 휘감은 산모롱이 돌고 돌아 깎아지른 단애에 새집처럼 앉아있을 것만 같았던 기림사.

마치 고절(孤節) 한 노송이듯 그렇게 기림사는 자리했을 것 같았다.

경주 감은사지를 지나서부터  차는 포장도로를 버리고 내처 변화 없는 들길만을 달렸다.


따르는 산자락조차 헐벗었고 실개천은 말라 있었다.

다만 야산 잡목림 주름 주름에 새 잎 피는 소리 그윽했으며 냇가 수양버들이 순한 연둣빛 주렴을 드리운 채 살랑거렸다.

기림사 입구에서 차를 내려 무지개 모양 석교를 건넜다.

다리 저편에 이승을 두고 미지의 새를 찾아 피안에 든듯한 마음으로.

조금 전 먼지 속을 지날 때는 분명 속진(俗塵) 세상, 사바였다.

그러나 이곳은 새소리 혼자 빈 가지 결결에 봄을 새기는 피안이었다.

숲은 아직도 겨울의 묵상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한동안 나목(裸木)의 숲을 올랐지만 기림사는 금방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입정(入定)의 시간을 넉넉히 베풀었다.

드디어 언덕 하나를 딛고서자 잿빛 기와부터 보였다.

황사 자심해 창백해진 하늘을 배경으로 산허리에 비스듬 선 가람.

그 한켠에 흐드러진 벚꽃 구름이 불경스레 치마끈을 풀고 있었다.

만개한 꽃은 이제 질 일 밖에 남지 않았으니 그럴수록 더 헤프거나 추하진 말 일인데.



오롯이 마음 간추려 정돈하고 대적광전에 들었다.

육중한 문은 삐그덕 저 혼자 닫혔다.

닫힌 문, 닫힌 마음.

그 마음 열기 위해 손을 모았다.

일심(一心). 그러나 이 역시 화려한 언어의 희롱일 뿐.

매 순간 감겨드는 오욕칠정에 매인 채 내 어찌 한마음에 이르랴.

그저 잠시 삼독에서 벗어나고자 발원문만 무성했지.

게다가 마음을 비운다는 건 얼마나 가당찮은 범부 중생의 환상인가.

더더욱 연꽃을 받쳐 들기엔, 연꽃을 피워 올리기엔 알게 모르게 지은 업장 소멸이 까마득한 것을.

그을음 속에 재채기할듯한 부처님이시라 양쪽 문을 활짝 열어 두고 나왔다.

내 마음도 함께 열리는 듯했다.


내 눈도 한결 씻겨진 듯했다.

그때 뜨락의 보리수도 새 눈 틔우려 준비하며 조용히 물을 퍼올리고 있었다. 19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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