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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읍민속마을의 봄

by 무량화


주말 내내 심술부리던 날씨가 좀 번해지기에 정오 무렵 표선에서 성읍마을로 가는 차를 탔다.

작년 봄에 다녀왔으니 일 년 만이다.

성읍마을엔 화사한 벚꽃이 구름처럼 피어났으며 유채꽃물결이 넘실거렸다.

현무암 검은 돌담가 붉은 동백은 뚝뚝 이울고 있었다.

해묵은 고목들 막 눈엽 돋아 가지마다 어린 녹두색 연연했다.

자연은 절로 절로 봄 향훈 뿌리는데 도대체 웬일일까?

마을 초가집들은 어쩐 일인지 빈 채로 휑하니 찬바람만 드나드는데 관리까지 허술해 폐가 분위기였다.

빈집 뜨락에 원색 플라스틱과 비닐 쪼가리들이 시선에 거슬렸으며 장식이라고 여기저기 올려놓은 하귤은 외려 거북스럽기만 했다.

관광객들이 찾는 성읍민속마을다운 토속적인 아이템이 그리 없을까 싶어 딱해 보였다.

바람 거센 날씨 탓인가, 관광객 대상으로 판 벌인 치졸스런 활쏘기장, 전통주 이름 내건 주막집도 한산하기 그지없었다.

다만 그간 팔던 굼벵이, 그것도 해묵어 썩은 초가지붕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굼벵이 양식장에서 대량으로 나온 걸 자연산이라 광고하는 뻔한 상술만이 아니다.

천연염색제품을 내세웠으나 한눈에 봐도 싸구려인 스카프 따위 팔지 않아 다행이긴 하더라만.

관광제주 품격 떨어뜨리는 행위들에 대한 집중 단속 기간이기라도 한 걸까.



성밖 마을을 대강 둘러본 다음 성안으로 들어갔다.

제주도는 조선시대에 세 개의 행정구역으로 지역이 나뉘어 있었다.

현재 제주시내인 제주목, 현재 대정읍인 대정현, 현재 표선읍에 해당하는 정의현으로 분할됐었다.

조선 태종 16년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된 정의현청을 세종 5년 이곳으로 옮겼다.

그 후, 5백여 년간 현청 소재지였던 유서 깊은 마을이라 동헌 객사 향교 등 옛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민속 유물과 문화유산들이 다수 모여 있다.

유교국가인 조선이라 정의향교 알차게 갖춘 규모로 충분히 도 유형문화재급이 되고도 남을 만.

같은 도 유형문화재인 일관헌(日觀軒)은 현감이 정사를 보던 청사인데 의외로 네 칸짜리 단출한 동헌임이 신박했다.

일헌관 주변의 천년수(千年樹) 거목 느티나무와 팽나무 세 그루는 천연기념물 제161호로 지정된 나무다.

중산간지대 특유의 향토음식인 오메기술은 제주도 무형문화재 3호로 기능보유자에 의해 전승되고 있으며 고소리술은 도 무형문화재 11호, 국가 무형문화재인 제주 민요가 성읍에 남아있다.

오돌또기 맷돌노래 등은 중요무형문화재 제95호로 지정된 제주전통민요다.

뜻밖에도 일관헌 바로 뒤편에 관청할망당이라는 명칭을 단 무속신앙의 기도처가 떡하니 자리잡고 있다.

어느 해 비 내리는 가을날, 세미나를 마친 후 비옷을 입은 채 '제주 동쪽의 신당'을 돌 때는 문이 열려있었는데 굳게 닫힌 문.

이 할망당 여신은 유독 패물을 좋아해 은비녀나 옥구슬 등이 제단에 올려져 있었던 기억이 났다.

신에 따라 제단에 올리는 품목이 달라, 어린 동자신은 과자나 사탕을 좋아하고 어떤 신은 떡을 올리기도.

하긴 사람마다 구미가 다르듯 신 역시 입맛이 제각각 아니겠나.

정의현성 안에는 조선시대 도시 주거 형태를 보여주는 백여 호에 달하는 가옥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데 그중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초가가 다섯 채이며 성 밖으로도 많은 한옥들이 현존한다.

그래서인지 제주도 전통초가 기능 보유단체인 '초가장'을 인정하여 원형복원에 힘 모으는 성읍마을이다.

따라서 해마다 이맘때면 초가지붕 이엉을 새로 얹기에 기대를 하고 간대로, 운 좋게도 지붕 잇는 현장과 새끼꼬기 장면을 눈에 담을 수 있었다.

육지에서는 볏짚으로 초가집 이엉을 잇지만 벼농사를 짓지 않는 제주라 볏짚 대신 새라고 하는 마른 억새풀을 사용하는 게 다르다.

이엉 재료는 짚, 갈대, 억새, 골풀, 종려나무 가지와 같은 식물을 엮어서 쓴다.

이엉을 얹은 다음 마무리 짓는 새끼줄도 마찬가지로 볏짚 촘촘히 꽈서 만드는 게 아니라 새를 이용하는 게 달랐다.

어릴때 새끼줄 꼬는 걸 본 기억으로는 남자들이 바닥에 앉아서 양 발로 시작점을 고정한 뒤 손바닥으로 볏짚을 비벼가며 꼬아나갔는데 제주에선 여자들이 선채로 새를 둘둘 말아가며 꼬아줬다.



금번 성읍나들이에서 가장 큰 수확은 웬일로 개방시킨 향교에 들어가 찬찬히 둘러볼 수 있었던 점이다.

대부분의 향교는 제전을 거행하는 날 외에는 문이 거의 잠겨져 있다.

성읍향교 역시 몇 차례 문 앞까지 가봤으나 문밖에 서서 어렵사리 문틈으로 겨우 들여다보는 게 전부였다.

대정향교도 처음엔 문이 닫혔었는데 근자에는 문을 열어놓더니 그처럼 향교마다 규범의 결을 같이 하는 걸까.

향교는 한양 성균관의 지방기관으로 지역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한 국립교육기관이다.

동시에 공자를 비롯한 여러 성현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비교적 조용한 곳에 위치해 여기도 민가와 거리를 둔 약간 높은 언덕에 건립되었다.

좁은 골목이 대성문까지 나있으며 경내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과 재실, 학문 공간인 명륜당, 수선당, 수호사, 내삼문, 서재 등과 협문이 배치돼 있다.

재실에는 전패(殿牌)가 보관되어 있는데 전패란 '전(殿)'이란 글자가 쓰인 나무패(木牌)로 이는 대전(大殿)인 임금을 상징하는 위패다.

명륜당 앞 좌우에 있는 서재와 동재, 동재에는 생원들이 거처하였고 서재에는 진사들이 거처하였다 하나 조선 후기에 양민의 입학이 늘면서 동재는 양반의 자제, 서재는 양민의 자제가 사용하여 신분을 구별하였다고.

그처럼 신분제가 엄연했던 조선, 지금의 조선땅이라고 의식이 달라졌을까.

하여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란 책이 한때 베스트셀러에 오르기도.

향교는 문묘가 있는 신성한 곳이므로 향교를 지날 때는 누구나 말에서 내려야 한다는 하마비(下馬碑)가 있었다는데 여긴 유채밭만 있었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우측에 공덕비 주르름 서있고 정면 상부에 위엄 어린 대성전을 모셨으나 당연 문은 잠겼다.

세상이 바뀌었어도 태도 다소곳, 삼가 조심스러운 걸음새로 향교를 물러났다.



향교를 나와 고샅길 지나서 남문으로 가는 큰 길가 객사를 슬쩍 훑어봤다.

대문 문턱을 넘어서면 너른 안마당과 단정한 객사 건물이 보이고 그 옆에 화장실 또한 널찍하다.

객사 용도는 지방관이 한 달에 두 번 임금 향해 배례를 올리는 곳이자 중앙관리가 내려왔을 때 머무는 숙소였고 영빈관 기능을 갖고 있어 고을 경로잔치나 연회를 베푸는 장소였다.

다시 걷다 보면 남문과 직선길에 직사각형의 노다리 방죽이 물풀 담은 채 반짝거렸다.

예전엔 못에 창포를 길러 기생들이 머리를 감았다는데 시커먼 물이 깊이 모를 듯 겁나 보였다.

바로 지근거리에 원님물통이 기다리는데 마치 스페인 가우디 작품같이 곡선으로 만들어진 현무암 우물터다.

거기서부터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초가가 이어지는데 그보다 관심 더 닿는 집은 돗통시가 드러난 집이다.

볼일을 보며 작대기를 들고 돼지를 후치는 소년의 동작이 코믹해 외국인들 카메라도 바쁘던 스팟이다.

모퉁이 끝에 드디어 나타나는 이층 누각의 남문.

전에는 남문 성벽 위를 걸을 수도 있었는데 지금은 폐쇄됐고 문을 통과해 밖으로 나서면 유채밭 광활하게 펼쳐졌다.

샛노란 유채꽃 속에서 스몰 웨딩촬영을 하는 청춘 한쌍, 영화 한 장면 같이 사랑스러운 정경이었다.

정녕 봄은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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