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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덕정에서 성곽길 따라 제주 역사를

by 무량화


관덕정은 제주 원도심에 들릴 적마다 왠지 다녀와야 할 거 같아 꼭 들르곤 한다.

거의 습관처럼 발길 저절로 향하게 되는 곳이다.

어쩌면 그 연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오십 수년 전인 대학시절, 제주 친구 집에 와서 맨 처음 구경 갔던 관덕정이라서일까.


보물 제322호인 관덕정을 비롯 제주목 관아 부속건물 여럿을 거느린 데다 연못도 꽤 운치롭다.

제주목 관아를 한 바퀴 돈 다음 거리로 나와 발길 가는 대로 이 골목 저 골목 누빈다.

그렇게 걷다 보면 불운한 왕 광해군 적소터도 보이고 갑오개혁을 주도했던 김윤식 유배터도 보인다.

제주도성인 성곽길 찾아 두리번대다 보니 제주시 이도 일동 안내판이 나온다.

옛 친구네가 살던 동네인데 지금은 칼호텔 등이 우뚝 선 고층 빌딩 숲을 이룬 이도 일동이다.



올레길도 코스 따라 차근차근 걷기보다 발길 닿는 대로 들쑥날쑥 자유로이 걷는 게 내 스타일.

성벽길 역시 탐방로대로 얌전히 지도 펴 들고 다닐 리 만무다.

이리저리 갈지자에 지그재그 형태로 걷다 보니 저만치 성벽이 나타난다.

제주도성 또는 제주읍성이라 불리는 성곽길에 드디어 이르렀다.

서울에 한양도성이 있듯 이형상 목사의 탐라순력도에도 '제주도성'이라는 표현이 나온다.

본 제주성은 1914년도까지만 해도 원래 형태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나 일제가 전국 읍성 철폐령을 내리면서 사라져갔다.

일본 측 시각으로야 왜적으로 불린 자신들을 방어하기 위해 쌓은 성이니 꼴도 보기 싫었을 법하다.

1920년대 들어 제주항을 건설하며 성곽의 돌들을 들어다 사용하므로 결국은 심하게 훼손당하고 만 제주도성이다.

따라서 지금은 오현단 일대에 복원시킨 구간과 잔존 구간 약 100m 정도만 남아 있을 뿐 선대들 피땀으로 쌓은 성은 흔적조차 없다.

예전 성곽이 있던 자리에 대부분 큰 도로가 생겨 성곽 안쪽에 나있던 샛길과 이어진다.

성굽길을 돌아드니 오현단 출입구가 왼편에서 맞아준다.

조선조 건축 스타일은 전혀 아니고 중국풍에 일본 냄새도 나는 국적불명의 요상한 대문이 기분 께름하게 만든다.

사찰을 보면서도 이게 뭐야? 한 적이 여러 번인데 건물양식이 낯선 이유는 배경이 외딴섬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도 된다.

다만 그 독특한 분위기에 일본색이 너무 강하게 배어 있어 볼 때마다 떨떠름 씁쓸해 사진조차 담기 싫다.

게다가 초입부터 부조화의 극치를 보이는 콘크리트 이층 건물, 향로당(노인회관) 역시 정말이지 영 아니올시다!



오현단에 들어서서 고개를 치켜들면 노송 숲 사이 높직한 언덕 위 성벽 앞에 단아한 건물 한 채가 드러난다.

아무런 안내문도 없어 용처를 모르겠으나 조촐한 자태로 보아 사당 분위기다.

느낌상 향현사가 분명하다.

향현사(鄕賢祠)는 오현단 영혜사의 동쪽에 있었으며 고종의 서원철폐령에 따라 향현사 유허비만 남아있다는 기록뿐.

유허비가 아닌 건물일 리는 없으나 어쩐지 그 사당이 맞지 싶어 한참 주변을 맴돌았다.

향현사는 헌종 때인 1843년 제주목사 이원조가 세종 당시 한성판윤을 지낸 고득종을 봉향하고자 세운 사당이다.

고득종은 부친 고봉지를 따라 열 살 때 제주에서 상경하여 태종 때 문과에 합격하고 세종 초 문과 중시에 합격하였다.

제주 목마장에 관해 세종의 자문에 응하며, 세종의 총애를 받았다.

세종 19년(1437)에 종마진공사로 중국에, 세종 21년(1439)에 통신사로 일본에, 세종 23년(1441)에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왔다.

황희(黃喜)와도 친분이 깊었으며 안평대군(安平大君)의 몽유도원도(夢遊桃源圖)에는 그의 찬시(讚詩)가 올라있다.

이후 제주목사 이예연이 김진용을 함께 배향하였다는데 두 분 다 후세에 귀감이 될 덕행과 공적을 쌓은 분들이라고.

해묵은 노거수 들이차 어둑신한 숲에서 까치 우짖고 뭇 새소리 영롱하게 어우러진다.

성벽 아래 우거진 숲 따라 오른쪽으로 걸어 나가자 비석들이 연달아 마중 나온다.

저만치 보이는 건물은 귤림서원이겠고 그 아래론 수장당이 틀림없겠다.



드디어 오현단에 이르렀다.

제주섬 내의 교육과 학문 발전에 공헌한 다섯 분을 배향했던 제주 문화유적의 터인 오현단.

오현단은 조선시대 제주로 유배되었거나 관리로 파견된 분들 중 다섯을 가려 뽑아 배향한 곳이다.


향현사 유허비문 옆에 작고 소박한 오현단 조두석과 글씨체 마모돼 헤아리기 쉽지 않은 비문이 기나긴 일월 증거하고.

오현단 조두석 서쪽 암벽에 증자와 주자의 뜻을 벽에 새겨 세운다는 글인 曾朱壁立이란 송시열의 큰 글씨가 보인다.

오현으로 추대된 분들이 제주에 관해 남긴 시를 새겨 오현단 경내에 세워두었다

어둠침침한 나무그늘 아래 나란히 선, 위패를 상징하는 다섯 개의 키 낮은 조두석은 하도 작고 소박해 선뜻 시선에 들지 않는다.

그래선지 새로이 오각기둥 모양 빗돌에 오현 선생의 호와 이름을 크게 새겼다.

아래에다 제주에 왔던 시기, 제주에 왔을 때의 신분, 최종 벼슬, 시호를 작은 글씨로 적었다.

까만 오석 위에는 지붕 모양의 화강암 가첨석을 덮었고 둘레에는 화강암으로 울타리를 만들어 둘렀다.

충암 김정 선생 ; 중종 15년(1520) 제주 유배. 형조판서. 시호 문정

규암 송인수 선생 ; 중종 29년(1534) 제주목사. 대사헌. 시호 문충

청음 김상헌 선생 ; 선조 3년(1601) 안무어사. 좌의정. 시호 문정

동계 정온 선생 ; 광해군 6년(1614) 대정 유배. 이조참판. 시호 문간

우암 송시열 선생 ; 숙종 15년(1689) 제주 유배. 좌의정. 시호 문정

시대순으로 이렇게 다섯 분이다.

그 가운데 나이 83세에 제주도로 유배된 우암 송선생적려유허비(尤庵宋先生謫廬遺墟碑) 비문은 한글로 풀이하면 일부 이러하다.

오호라, 제주의 동쪽 성안 산지골은 우암선생께서 귀양살이하던 옛터이다.... 중략. 고을 선비들이 옛 터를 찾아보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선생의 성대한 도덕과 위대한 업적으로서도 백 년이 채 못 되어 그 자취를 찾기가 어려우니 사림의 부끄러움이 아닌가 하므로 삼읍의 선비들이 의논하여 짧은 비석을 세워 표시한다... 후략.

오현단의 시초라고 할 수 있는 귤림서원은 제주 최초로 명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드리던 곳이다.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된 뒤 사사된 김정(金淨)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1578년(선조 11) 판관 조인후가 지었다.

이후 송인수, 김상헌, 정온, 송시열 등 오현을 배향하게 되었다.

조선 시대 유학의 전당으로 제주 유생들의 지주 역할을 했던 귤림서원은 동시에 교육기관으로 인재를 키우던 학교였다.

서원 아래 있는 장수당은 당시 교실로 쓰였다고 한다.

귤림서원을 지나 성벽이 끝나면서 비로소 이날의 역사 산책은 마감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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