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인지 초입인 바닷가 온평 마을에서 진짜 올레를 만났던 생각이 났다.
변화무쌍한 서귀포의 봄 날씨.
간밤까지만 해도 별빛 보이지 않을 만큼 희끄무레하던 하늘이었다.
아침해 찬연히 뜨더니 대기는 아주 창창해 명징할 정도였다.
잔설 희끗한 한라산이 또렷하게 다가섰다.
배낭 둘러메고 동쪽 바닷가로 향했다.
최종 목적지는 이름도 예쁜 종달리이지만 혼인지 초입인 온평리에서 일단 하차했다.
마을 고샅길 걸으며 접해본 올레의 원형을 다시 만나보고 싶어서였다.
제주의 여느 마을이나 돌담 흔하긴 하지만
유독 이 동네엔 해묵은 돌담이 곳곳에서 자주 눈에 띄었다.
온평리 고샅길에서 특별하게도 원형이 거의 그대로 남아있는 올레를 여러 번 만난 바 있다.
예전 흙길 더러 보이나 거의가 시멘트로 각지게 포장, 멋은 반감 정도가 아니라 완전 훼손됐을지언정.
세차게 부는 바람을 다스려주고 외부인의 시야를 가려주는 공간이자 소나 말을 마구간으로 몰아들이는 소임을 하는 원래의 그 올레.
나무위키 설명처럼 '큰길에서 내 집 마당에 이르는 조붓한 골목 비슷한 길' 말이다.
이미 고유명사로 굳어버렸지만 올레길은 바른 표현방식이 아니라는 어느 건축가의 말대로다.
보통명사인 길, 즉 도로가 아니라 내 재산에 속하는 땅을 의미하는 대지(垈地)이다.
소설 속 중세 유럽의 대장원에 들어서면 입구 양편에 똑 고른 사이프러스 짙푸른 나무가 시립해 있다.
그런 길을 한참 지나야 비로소 영주의 거처인 위엄 어린 장원이 모습 드러낸다.
구조상으로 비슷한 형식이 아닌가 싶기도.
미국 주택 앞에 세워둔 우편함도 마찬가지 역할을 한다.
거기서부터 자택 대지를 포함, 전역의 토지소유권이 묵시적으로 인정된다.
따라서 개인 소유인 그 안에 함부로 들어서는 걸 용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주 올레는 어디까지나 안과 밖이 자유롭게 소통되는 공간이다.
제주시 삼성혈을 답사한 바 있고 성산포 가다가 들른 온평포구.
신비로운 신화는 이렇게 전해진다.
목함에 실려 동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가 닿았다는 포구,
탐라국을 개국한 고 ·양 ·부 세 신인은 동시에 배필을 맞아 혼인하게 되는데....
손꼽아 기다리지 않아도 인연 따라 꽃은 피고 열매 맺느니.
<고려사> 11번 탐라 고기(古記)에 따르면 '태초에 사람이 없더니 땅에서 삼신인(神人)이 솟아났다' 고 했다.
한라산 북녘 기슭에 ‘몽흥굴’이라 부르는 혈(穴)이 그곳인데 지금은 삼성혈이라 칭한다.
삼신인이 한라산에서 사냥을 하고 있을 때 남동쪽 바다에 떠오는 커다란 목함이 눈에 띄었다.
한달음에 현재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에 다다라, 매우 중해 보이는 목함임을 알아차린 삼신인은 쾌재를 불렀다.
목함을 뭍으로 끌어올리자 사신이 먼저 말을 타고 나와서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동해 벽랑국의 사자입니다. 우리 임금께서는 세 공주를 두셨는데, 장성하여도 배필을 구하지 못해 안타깝게 여기셨습니다.
그러던 중 서해 높은 산에 장차 나라를 세울 삼신인이 있으나 마땅한 배필이 없다는 걸 아시고 세 공주를 모시고 오게 하였지요.
하오니 세 공주를 배필로 삼아 대업을 이루십시오.” 하고는 홀연히 구름을 타고 사라져버렸다.
세 공주가 내리고 난 뒤 목함에서는 오곡과 가축들이 뛰어내렸는데 그 발자국이 아직도 온평리 바닷가인 열혼포에 남아있다고.
공주가 해안에 닿을 때 황금빛 노을이 지고 있어서 ‘황루알(황노알)’이란 이름이 유래되었다는 이곳.
세 신인이 쾌재 불렀다는 장소인 쾌성개, 함에서 나온 꽃가마가 최초로 닿은 오통, 공주들이 디디고 올라왔다는 디딤팡돌도 있다.
‘온평리’의 본래 이름은 그래서 ‘열혼포 (列婚浦) 혹은 영혼포(迎婚浦) 등으로 불렸다고.
고(高)·양(梁)·부(夫) 삼성과 벽랑국의 세 공주가 혼례를 올린 마을이라는 데서 비롯된 이름이겠다.
포구 앞에는 바닷길 저만치 뻗은 다릿길 위에서 세 신인이 세 공주를 맞는 장면의 석상이, 거느리고 온 동물들과 함께 서있다.
조각 표정이나 자세도 그렇고 배치 형태까지 조급하게 얼렁뚱땅 만든 티 역력해 영 어설퍼 보인다.
앞으로는 심도있게 고민 좀 해, 조각상 하나 세우더라도 졸속 전시물이 아닌 예술품으로 격상시키고 무엇보다 고증에 충실했으면.
마을 앞 해안선의 길이가 6㎞ 정도로, 제주도 해안마을 중 해안선이 가장 길다는 이곳.
온평포구에는 제주에 몇 개밖에 남지 않은, 현무암으로 쌓아올린 첨성대 닮은 도대가 우뚝 솟아있으니 눈여겨보길.
어로작업을 나간 어부들이 생선 기름 이용하여 불을 밝혔던 전통 등대인 ‘도대’가 아직도 잘 보존되어 있으므로.
제주 명소가 된 올레길은 제주도의 각광받는 도보여행 트레일 코스로 자리 잡혔다.
올레 3코스에 속하는 온평마을 걷는 중에도 올레꾼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어디까지나 알까?
도통 모르기에 진짜 올레는 거들떠도 안 본다.
현존하는, 나아가 언제 사라질지도 모르는 이것이 바로 올레라는 것을
안타까운 마음에 아는 척 설명해 줘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다.
어원까지 챙길 여유 없으면서 그래도 느릿느릿 걷는다는 자부심 대단하다.
겉멋에 들려 먼 스페인까지 가서 한 달 내내 걸었던 나나 그들이나 유행의 조류에 휩쓸리기는 마찬가지이겠지만.
꽃 만개하고 나면 꽃지고 열매 맺힌다.
그도 아니면 한때 호시절 보내고 나서 마련없이 잊히기도 한다.
반짝 떴다가 스러지는 유행이 아니라 어느새 고유명사가 된 제주 올레길.
그러나 올레는 길이나 도로가 아니고 대지(垈地)를 의미한다.
"올레는 대로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을 뜻하는 제주 방언이다.
이처럼 올레는 마을 큰길 - 어귀 - 올레 - 올레목 - 마당으로 이어지는 땅이다.
전통가옥에 거의 다 있는 구조로 과거엔 집집마다 한 올레씩 꼭 갖춰져 있었다.
폭은 2미터 정도로 그다지 넓지 않아 소 한 마리가 드나들기 넉넉한 너비면 족했다.
큰 길가에 접하는 담은 낮은 편이나 집 주변은 처마 높이에 가깝게 쌓았다.
밖에서 집안이 바로 보이지 않게 외부 시선을 차단하고 바람으로부터 주거공간을 보호하기 위함이었다.
특히 바람이 강한 제주도의 특성상 올레는 대개 곡선으로 만들었다.
하여 바람이 올레를 타고 집으로 들어오더라도 휘어들어오면 약해지기 마련이다."
위 내용은 나무위키를 옮겨실었다.
투명히 맑은 포구에 서서 수평선 바라보며 까마득 먼 일월을 짚어보다가 천천히 뒤돌아서 동쪽으로 내처 걸어 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