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봄, 길섶에 민들레가 금화 뿌린 듯 샛노랗게 깔린다. 봄부터 초여름까지 풀밭 어디서나 흔히 만나는, 그래서 아예 지천인 들꽃이 민들레다. 감광성 식물인 민들레는 해가 돋으면 꽃이 피고 저녁엔 오므라드는 예사 풀꽃이다. 그러나 꽃이 지고 씨를 품는 순간부터 본능적으로 화경(花莖)을 쑥 밀어 올려 씨앗을 널리 퍼뜨릴 준비를 하는 경이로운 식물이다.
민들레 꽃을 볼 적마다 생명의 신비 앞에 내심 놀라곤 한다. 우거진 풀덤불 사이에 돋은 민들레는 옆자리 풀보다 한층 더 키를 돋우어 꽃대가 움쑥 크다. 깎일 염려가 없으니 얼마든지 키가 커도 상관없는 장소라는 걸 알기라도 하는 듯이. 그러나 잔디밭에 돋은 민들레는 땅에 납작 깔려 거의 부복 자세다. 잔디 깎는 기계도 피할 정도의 낮은 키로 지표면에 바짝 붙어 자라는 것이다. 용케도 잔디 기계에 밀리지 않은 채 꽃을 피운 것도 신기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건 전날 핀 꽃대다. 단 한나절의 역사만으로 무수한 씨앗을 준비하고는 키다리처럼 한 뼘쯤 솟아 오른 꽃대궁. 씨앗을 하얗게 매단 둥근 비눗방울이 바람을 기다린다. 분신들을 멀리멀리 떠나보내주기 위해서다. 새로운 땅 더 너른 영토에서 힘차게 번식하라고 하얀 깃털 가벼이 나래를 달아준 신의 배려가 뭉클하다.
아홉 가지 덕을 지니고 있다는 민들레. 그중, 아무리 짓밟히거나 뿌리를 다쳐도 다시 살아날 정도로 역경을 이겨낸다는 민들레다. 본 자리에 집착 두지 않고 훌훌히 고향을 떠나는 때문인가, 민들레는 흔히 이민살이 삶과 비유되기도 한다. 그만큼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야생초가 민들레다. 바람을 타고 정처 없이 날아가던 씨앗은 어디든 머무는 그곳에서 새 삶을 가꾸어간다. 그 자리가 어떠한 장소이든 환경에 구애받지 않는 민들레. 땅속 1미터 가까이까지 물을 찾아 뿌리를 내리는 민들레라 웬만큼 척박한 박토에서도 능히 살아남아 제 영역을 넓힌다. 하다못해 도심 보도블록 틈새에서도 샛노란 꽃을 피우는 민들레가 아닌가.
잔디밭이 너른 집에선 나도 그러했지만 미국인들이 싫어하는 식물 중 하나가 민들레다. 정원의 잔디를 망가뜨리는 주범이기 때문. 웬만한 잡초제거제로는 좀체 죽지 않는 지독한 풀이라 전용 제초제가 따로 필요하다. 오죽하면 골치 아픈 사고뭉치를 이르는 '민들레 같은 작자'라는 속어가 다 생겼을까. 그럼에도 잔설 속에서 제일 먼저 봄을 알리기에 나는 민들레가 반갑다. 아침해와 눈맞춤하며 환히 꽃을 피우는 부지런함도 맘에 든다. 어디서든 터 가리지 않고 영토를 넓혀가는 강인하고 왕성한 생명력이 짠하니 아리땁다. 대지에 바짝 몸 낮춘 겸손함이 미쁘다. 어느 시인의 시처럼 '자식들 눈물로 키운 내 어머니 같은 꽃' 민들레가 그래서 나는 좋다. 시리운 이민 생활자의 향수를 다독여주는 그 꽃은 그렇다, 그 꽃은 고향이기도 하다.
길을 걷다가 낯익은 그 노란 꽃 무리를 만났다. 게으름뱅이 민들레네, 철 지난 지가 언젠데... 지청구를 했더니 함께 걷던 친지가 요즘 피는 건 씀바귀꽃이라고 일러준다. 멈칫해졌다. 찬찬히 꽃자리를 둘러보니 노란 꽃이 얼핏 비슷한 듯하나 민들레처럼 숱 많은 겹꽃이 아닌 데다 풀잎은 민들레와 영 다르다. 그저 샛노란 앉은뱅이꽃에다 꽃 진 자리에 솟는 비눗방울 같은 씨앗만으로 다 민들레이거니 몰아버렸더랬는데 서로는 영 다른 종류였다. 둘 다 국화과의 여러해살이 풀이긴 하나 민들레는 초봄에 꽃이 핀다. 씀바귀는 그보다 늦게 꽃을 피운다 하니 생태부터가 판이한 풀이건만 구별 없이 그게 그거다 가벼이 치부했던 셈이다.
Who are you? 답변은 I'm American 인가. 요즘 한인 자녀들의 정체성 혼란에 대한 거론들이 분분하다. 이민자의 후예로 미국 땅에 튼실히 뿌리내린 2세 3세들. 미국 속의 확실한 미국인으로 굳건하게 자리 잡아 나갈지라도 변할 수 없는 그들의 본바탕은 역시 한국인이다. 언제 어디서라도 그들이 '나는 코리안 아메리컨'이라고 자신 있게 자기의 정체성을 밝힐 수 있었으면 좋겠다. 존재 인식을 바로 할 때만이 어중이떠중이 민들레가 아닌 분명한 씀바귀로 당당히 제 몫을 할 수가 있는 것은 아닐지. 나의 근본 나의 본질은 민들레가 아닌 씀바귀다. 자신이 과연 어디에 뿌리를 둔 누구인지를 깨우치는 것, 그렇게 깨달아진 자신의 존재 확인 나아가 자아 확신이 바로 정체성 확립이다. 팝의 황제로 군림해 온 마이클 잭슨의 피부색이 아무리 하얘졌어도 그를 백인으로 보진 않듯 민들레는 영원히 민들레고 씀바귀는 영원한 씀바귀인 것이다.
미국에 살면서 차이니스냐는 말을 많이 들었다. 이제는 그렇지도 않지만 처음엔 대부분 그렇게 물었다. 서양에 잘 알려진 나라이자 화교를 많이 내보낸 중국이라서 이리라. 널펀펀한 동양인은 뭉뚱그려 그저 다 중국 사람으로 여긴다. 민들레꽃과 씀바귀꽃이 엄연히 다르듯 중국과 한국은 전혀 다른 나라임에도 대충 그 나라가 그 나라거니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때마다 어이없는 표정이 되어 단호히 코리안임을 밝힌다. 그제야 미안하다며 현대 차의 인기도를 얘기하고 삼성 휴대폰 성능이 아주 뛰어나다는 둥 너스레를 떨기도 한다.
그들에게 나는 그냥 민들레였다. 민들레꽃이 아닌 씀바귀꽃이라는 걸 알려주면 딴에는 관심을 표한답시고 너희 나라말이 따로 있느냐고 묻기도 한다. 물론이지, 이때 다시 한번 내 목소리가 커진다. 당시 일터 앞자리에 떠억 걸려있는 훈민정음 목판목 탁본을 가리키며 우리 고유의 언어라고 자긍심 어린 표정으로 설명도 한다. 물경 오백 년도 더 전, 그러니까 1446년에 만들어진 우리 고유의 말과 글인 한글이다. 이를 세종임금이 만든 목적은 백성의 편리한 글자살이를 위해서란다. 전 세계 언어학자가 한글은 가장 과학적이고 편리한 문자임을 공인하였노라고 자랑스레 부연 설명하고 싶지만 어쩌랴, 그러기엔 턱없이 부족한 내 영어실력이니. 해서 영어 수업에 열심을 내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