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리산에 봄이 무르녹으니 산자락마다 꽃대궐이 따로 없다.
누군가 그랬다. 사방천지 어디라도 시선 돌리는 데마다 하도 볼 게 많아 봄이라고.
산비알에서 진달래꽃 무더기를 만났다.
문득 고향을 생각나게 하는 그 꽃.
진달래꽃, 하면 자동으로 와락 안겨드는 이름이 있다. 김소월.
해설 자체가 무의미한, 수식어가 더 이상 필요 없는 소월의 진달래꽃.
세상의 모든 진달래꽃은 소월로 귀결되기라도 한 걸까.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수미상응으로 애연한 정감을 각인시키는 시다.
우리 고유의 민족 정서를 한으로 풀이한다.
한은 맺힌 응어리이고 상처이고 핏빛 처절한 고통이지만 한은 원한이나 원망이 아니다.
입 앙다물고 증오하면서 기어코 되갚거나 갈구려는 독기가 아니다.
한과 결이 같은 원한은 저주나 복수가 따르나, 한이 쌓여 화병은 됐을지언정 체념으로 끝나는 퇴행적 감정만은 아니었다.
속담에 여자가 한을 품으면 오뉴월에도 서리가 내린다 했듯 그래서 씻김굿이나 살풀이 통해 서리서리 맺힌 한을 푸념으로 날려 보냈다.
밟힌 풀 되일어나고야 마는 생명의 오기처럼 맺힌 한을 딛고 일어나려는 생명의 의지랄까.
우리네 한은 소월의 시에서 나타나듯이 아픔마저 아름다이 치환시키고 순화해나간다.
임이 이별을 고하고 돌아서더라도 그 걸음걸음에 진달래꽃 뿌려놓아 가는 길 곱게 꾸미겠다니, 앞날 축복해 주겠다니....
나 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진달래꽃 아름 따다 가실 길에 뿌리오니 가시는 걸음걸음 놓인 그 꽃을 사뿐히 즈려 밟고 가시옵소서, 이런 심정 쉬 이해되는가.
하기사 시심이니 그러하겠고 근세까지만 해도 가능했을 정서다.
아주 오랜만에 정든 임이 오셨건만 말도 못 건네고 옷고름만 만지작거린 아녀자 예사이던 시절 얘기다.
속 깊은 그런 심사는커녕 억하심정 들어 독 품고 앙갚음 아니함만도 다행인 세태에 이르러, 떠나는 길목에 산화 의식까지 치르려 한다?
불교에서 불전에 꽃을 올리는 꽃 공양과 달리 산화 공덕(散花功德)이란 말은 법회 시 행하는 전통의식의 하나를 이른다.
부처님이 지나시는 길에 꽃을 뿌려 그 발길을 영화롭게 한다는 축복의 의미를 지닌 산화 의식.
요즘 축제나 파티의 클라이맥스에 금빛 은빛 컨페티를 뿌리듯, 결혼식에 화동이 꽃잎을 뿌리듯, 불전에 꽃을 뿌려 공덕을 기린다는 뜻이다.
얼마나 귀한 사람이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꽃을 그 발아래 뿌리고 싶어질까.
여리디 여려 애잔한 꽃잎 하나 차마 떼낼 수가 없는, 저 애틋이 연민 서린 꽃 진달래.
수십 년 전 화왕산에서 화염처럼 발갛게 번지는 진달래 꽃길 속을 걸어갔던 기억.
사십 대 산행 추억이 시 속의 영변 약산과 아롱아롱 겹쳐졌다 멀어진다.
가까운 목전의 진달래꽃은 그나마 황사에 먹히지 않았지만 보다시피 먼 아랫녘 섬진강은 깊은 안개에 싸인 듯 희미하다.
사진마다 희득스레 만든 공해 생성 주범인 중국 밉다 상말 뱉으려다 얼른 삼킨다.
대신 진달래꽃을 보아서라도 안개 자욱한 운치 있는 풍경으로 환치시켜 마음에 새기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