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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Apr 23. 2024

루트 66, 분노의 포도 그 여로

mother's road

로스앤젤레스 도심에서 서쪽으로 몇 분만 가면 활기차게 약동하는 산타모니카 해변이 모습을 드러낸다. 긴 해안선에 둘러싸인 짙푸른 태평양이 가슴 드넓게 열고 방문객 모두를 품어 안아준다. 맘만 먹으면 평일 오후 아무 때나 잠깐 바닷바람 쐬러 나갈만한 곳. 연신 모래톱을 핥는 파도, 흉금 시원하게 관통시키는 해풍이 세사에 휘둘리며 곤고해진 심신을 쓰다듬는다. 해변을 따라 산책하거나 선탠을 하는 사람들은 모랫벌에서 한껏 여유롭다. 본격적인 피서철은 아니나 물놀이를 즐기는 어린이, 서핑을 하는 젊은이들은 푸른 물살과 하나가 됐다. 거기다 외지에서 온 여행객들로 사철 산타모니카 해변은 항상 붐빈다.​

Santa Monica Pier에 오르면 보드웍을 따라 죽 늘어선 식당 잡화점 놀이공원이 볼거리, 즐길거리를 마련해 놓고 기다린다. 피어 끝까지 걸어가는 동안 거리예술가인 악사며 혁필 치는 사람과 캐리커쳐 화가들을 만나게 된다. 비치파라솔 아래 각종 기념품가게가 전을 펼쳤고 피어에서 빠질 수 없는 낚시꾼은 갈매기와 어우러져 색다른 풍광을 빚어낸다. 그중에도 두드러지게 우뚝 서서 눈에 띄는 아래 표지판이 이채롭다. 루트 66과 관련된 각종 스티커가 붙어있는 작은 안내소도 나오는데, 거기가 바로 66번 국도를 내쳐 달려온 종주자가 맨 끝으로 마침표를 찍게 되는 그 종점이다. US Route 66. 이 도로는 단순한 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는 미국 국도의 어머니 격인 도로다. Santa Monica Pier는 루트 66, 그 멀고도 기나긴 국도의 종착점이 된다.​

Main Street of America이자 mother's road로 불리는 US Route 66. 일리노이주 시카고에서 시작돼 미주리-캔자스-오클라호마-텍사스-뉴멕시코-애리조나-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까지를 연결하는 장장 2천 4백여 마일에 달하는 국도다. 이 길은 최초의 대륙횡단 고속도로 중 하나였기에, 미지의 세계인 서부로 왜건에 전재산을 때려 싣고 달려온 이주민들의 애환이 서린 길이기도 하다. 30년대 대공황이 몰아치자 새로운 기회를 찾아 캘리포니아로 향하는 꿈의 여로였던 루트 66. 길의 대명사가 된 루트 66은 2차 대전 중에는 기차와 함께 군수물자 수송을 전담했던 주요 도로였다.



루트 66은 자동차 시대가 절정을 이루던 지난 반세기 동안 수많은 미국인이 꿈과 희망을 실어 날랐다. 비행기 여행이 보편화되기 전까지는 미국 대륙을 잇는 동맥 역할을 했던 도로였으니까. 그러나 1950년대 더 넓게 닦인 고속도로가 들어서면서 루트 66은 빛을 잃어갔고 1985년에는 지도상에서조차 그 이름이 사라졌다. 루트 66이 통과하는 애리조나 소도시 셀리그먼에 사는 엔절 델가디요란 이발사가 이를 아쉽게 여겨 1987년 ‘애리조나 루트 66 보호협회’를 만들었다. 쇠락한 옛길의 명성을 회복시키려는 노력이 결실을 맺어 2003년 ‘히스토릭 루트 66’이란 이름으로 도로를 복원시켰다. 현재는 길 위에서 행복한 자유여행자들의 여행목록에 들어있는 여로이자, 모터사이클 동호인이라면 이 대장정에 도전해 보는 것이 하나의 로망이기도 하다고.  ​



특히 이 도로는 스타인벡과  인연이 깊다. "굶주린 사람들의 영혼 속에는 분노의 포도가 가득했고...." The Grapes of Wrath의 작가 스타인벡은 중부 농민들의 대이동 행렬에 끼여 미 대륙을 횡단하며 이 소설을 구상했다. 그에게 미서부를 대표하는 문호라는 타이틀과 함께 퓰리처상을 안겨준 분노의 포도에 묘사된 루트 66 일부다. " 66번 도로는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텍사스에서부터 휘몰아치는 바람, 땅을 비옥하게 해주기는커녕 조금 남아 있던 비옥한 땅마저 훔쳐가 버리는 홍수로부터 도망치는 사람들.... 66번 도로는 이 작은 지류들의 어머니이며 도망치는 사람들의 길이다." 본문 244쪽.

오클라호마에서 소작농으로 살아가던 조드 일가는 계속되는 가뭄과 모래폭풍을 만나 몇 해째 농사를 망친다. 결국 은행과 대지주에게 땅을 빼앗긴 조드 가족 三代는 굶주림을 피해 도망치듯 고향을 떠난다. 인부를 많이 구한다는 전단지만 믿고 무작정 그들은 서부로 향한다. 조드 일가가 마지막 비상구 캘리포니아로 고물트럭을 몰고 가던 바로 그 길이 Route 66이다. 대평원을 지나고 애리조나 사막을 가로지르는 험난한 여정의 끝엔 그러나 일자리보다 일을 구하는 사람들이 더 많았다. 임금은 터무니없이 낮았고 지주의 횡포는 극심했다. 과격한 노동운동이 촉발될만한 여건들이다. 1930년대에만 21만 명의 농민이 루트 66을 따라 서부로 향했다니, 수요에 비해 공급이 훨씬 초과된 현상인 것만은 틀림없고.  ​



역경과 고난의 여정 속에서 주인공 탐은 비로소, 노동자의 곤경은 스스로의 연대를 통해 극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각성의 눈을 뜨게 된다. 자본주의의 문제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노동자들이 결집하여야만 산다는 메시지로 수렴되는 분노의 포도. 출간 후 찬사보다 비난 여론이 압도적으로 높아 소설은 금서판정을 받고 불태워지기도 했다. 그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요주의 인물로 지목돼, 당시 FBI 국장은 잠재적 위협요소라며 존 스타인벡을 평생 감시했다고 한다. "허기진 사람들이 밥을 달라고 소동을 일으키면 거기가 어디든지 간에 나는 반드시 그 속에 있어요." 탐이 어머니 곁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오늘날 한국의 노조는 귀족노조라는 비아냥을 받기도 하던데, 그들은 이리 처절한 정신적 성장계기를 만나지 못했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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