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락서원 뜰에도 봄이

by 무량화


이틀 연달아 내린 빗줄기로도 거두지 못한 황사 때문에 대기는 오늘도 불투명, 여전 우울 모드다.

미세먼지 농도가 수도권보다는 훨씬 낫지만 그래도 캘리포니아 매양 청명한 하늘빛 떠올리면 매우 갑갑하다.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 흐린 시야가 답답하도록 침침하지만 모처럼 개인 날씨라 안락서원으로 향했다.


기온도 마침맞아 뚜벅뚜벅 걸어서 충렬사까지 가보기로 하였다.

지하철을 이용하려면 거리도 얼마 안 되는데 두 번 갈아 타야 했기 때문이다.


바닷가 일광에서 이번엔 금정산 아래 온천장으로 이사 온 터라 삼사십 분쯤 걸어 당도한 충렬사, 안락서원이다.

애초엔 충렬사 아닌 뒷산 위의 동장대를 찾아볼 생각이었다.

동장대 오르는 길은 그러나 5월까지는 입산금지로 묶여있기에 옛 서원의 자취로 남겨진 소줄당(昭崒堂) 근처를 소요했다.

소줄당은 임란 당시 왜적과 싸우다 순국하신 선열들의 충절과 호국정신을 사표로 삼기 위해 1652년 교육 도장으로 건립한 강당이다.

맞배지붕의 기와 한옥인 소줄당은 이곳 충렬사가 부산광역시 유형문화재 7호로 지정을 받는데 근거가 된 유적지다.

소줄당은 한유의 '이제송(夷齊頌)'에 나오는 '소호일월 부족위명(昭乎日月 不足爲明) 줄호태산 부족위고(崒乎泰山 不足爲高)'에서 따온 당호(堂號)란다.

선열들의 충절은 해와 달보다도 밝고, 태산보다도 높다는 뜻의 첫 글자에서 집자해 소줄당이다.

숙종 때 동래부사를 지낸 권이진(權以鎭)의 글귀가 양 기둥에 시원스러운 필체의 주련(柱聯)으로 남아 있다.

안락서원(安樂書院), 별칭 萊山書院은 동래구 안락동에 있던 조선 후기의 서원이다.

선조 38년 동래부사 윤훤이 읍성 남문 안에다 임란 초기 순절한 송상현 공을 모시기 위해 송공사단(宋公祠壇)을 세운 게 시초가 되었다.

효종 3년에 송공의 학행과 충절을 기려 선비들에게 이 정신을 계승시키고자 내산(萊山) 밑 안락리로 옮겨 강당과 동재, 서재를 지어 안락서원이라 하였다.

원래부터 이름은 서원이지만 유교 성리학을 가르치는 순수 교육적 기능보다는 의로운 충신열사를 배향하는 공간으로서의 의미가 컸다.

임란 때의 충신과 열사들 모셨기 때문에 고종 당시 흥선대원군이 서원의 폐단을 통감하고 대다수 서원을 철폐하였으나 훼절되지 않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매년 2월과 8월에 봉행되던 제향이 민족정기를 돋운다 하여 일제가 제동을 걸며 이후 서원은 점점 낡아 허물어져 갔다.

1977년 박 대통령에 의해 ‘호국의 요람지’로 승격 정화, 충렬사로 확장하면서 서원 건물을 보존치 못해 수백 년 이어 온 서원의 본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그런데 충렬사 기념비 앞에 의연히 서서 작년만 해도 청청하던 주목,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는 주목 한 그루 품새가 영 이상하다.

감당키 벅차도록 험한 세월 탓인가, 박 대통령이 기념 식수한 그 나무가 이번에 보니 우듬지 거의 고사해 버리고 아랫단 겨우 푸르게 남았다.

강건하고 굳건히 버틴 정신 무너지면 유기체인 몸은 모래성처럼 부서지고 마는 것이라, 박 대통령 부녀 생각이 났다.

현재는 충렬사로 칭해지는 곳이지만 인근 지역명이 안락동이듯 안락서원의 맥은 아무튼 그렇게 연면히 이어졌다.



몸과 마음이 편안하고 즐거운 게 안락함이다.

동래구 안락동 인근은 아이러니하게도 임란 초기 왜군이 쳐들어 오는 대문 격인 자리에 위치했기에 모질도록 참담한 피해를 입었다.

성읍에 살던 백성 대부분이 목숨을 잃었던 임진년 봄, 그때 이름 없이 낙화한 하많은 넋이듯 동백꽃 송이째 툭툭 지고 있었다.

그러나 경내로 드는 길목엔 명자나무 꽃 한창으로 온데 무르녹는 봄기운, 어느새 매화 꽃잎 하늘하늘 날리는 곁에 오죽 잎새 윤기로웠다.

어느 공원 못지않게 조경이 잘 돼있어 여러 화목 다투어 꽃 필 터라 앞으로 자주 운동 삼아 찾아와 거닐기로 한 안락서원.

오늘 목표 삼았던 동장대는 충렬사 뒷산인 망월산(望月山) 정상에 자리했으니 솔숲 우거진 길 개방되는 오월엔 산행도 할 것이고.

경건한 장소이나 곳곳에 쉼터도 마련되어 있고 산책로가 잘 다듬어져 있어 지역 주민들 걷기 운동으로 건강 돕는 역할도 제대로 하겠다.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언제 와봐도 단아한 품새의 정원수 정갈하게 가꿔져 있는 데다 조형물 과하게 넘치지 않아 좋은 이곳.

직박구리 노래하는 모과낡이며 배롱나무 뾰족 새움 돋고 만개한 목련은 겨자색 풀어헤친 수양버들과 연못가에서 서로 조응하는 자리.

그 아래 잉어는 유유자적, 덩달아 안락서원 뜻만 새기는 실없는 산책객 하나 나잇값 못한 채 연분홍 봄 표정 다사로이 스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