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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핸 고사리 채취 노댕큐! 싫증 잘 내서?

by 무량화


올 사월에도 틀림없이 소식이 왔다.


햇고사리가 돋기 시작했다는 연통이다.


그물망 건조대에 삶은 고사리를 널어놓은 게 골목에서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고사리 장마라 부르는 4월이 되면 비 온 뒤 쭉쭉 올라오는 고사리 꺾는 묘미 각별하다고 했다.


희뿌연 안개숲 헤매보는 것도 운치 있겠다 싶어 호루라기 필히 지참하고 동행해 보고 싶었다.


드뎌 기회가 왔다.


작년 봄, 너무도 신이 나서 새벽 단잠 반납하고 다섯 시에 일어나 일행을 따라 산으로 향했다.


고사리를 꺾기 시작하면 거의 무아지경에 빠져 고사리에만 집중하는 완전한 몰입상태가 된다.


오죽하면 사진 찍을 잠시의 시간도 아까울까.


100% 그처럼 순도 높은 올인도 드물 것이다.


물론 도박이나 베팅처럼 내 모든 것을 전부 거는 게 아니라, 잡념 없이 정신을 홈빡 쏟아붓는 경우가 고사리 채취 외에 달리 또 있을까 싶지 않다는.


고사리 꺾는 일에 중독되어 비 좍좍 쏟아지는 날 외엔 한사코 몸과 마음이 고사리밭으로 내달렸다.


사월 내내 배낭에 꽉꽉 눌러 무겁게 짊어지고 아홉 시쯤이면 자못 흐뭇한 기분으로 하산했다.


섬휘파람새 흉내까지 내가며 아주 의기양양한 걸음새로야 마치 개선장군이라도 된 듯.



올핸 한번도 가지 않았다.


성격의 단점 중 하나라고 자인하는, 매사 싫증을 빨리 느끼고 쉽게 질려 버리는 편이긴 하다.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과 샘솟는 열정은 있으나 급한 성질대로 쉬 흥미를 잃고 싫증을 내는 사람임에도 지난해 사월 내내 꿈길에서도 고사리만 보였다.


하긴 싫증 잘 내는 끈기 부족한 사람이 오십 년 훨씬 넘게 혼인상태를 유지해 왔으니 그도 신통스런 일.


아무튼, 고사리 채취에 멀짜가 났다기보다는, 더 강력한 직접적인 이유로 인해 딱 그만 뒀다.


고사리밭에 드나들지 말라며 경고성으로 진드기 생태를 담은 동영상을 딸내미가 보내왔다.

산야에 흔하디 흔한 강아지풀 같은 벼과 식물에 진드기 어린 개체가 붙어있다가 파충류 몸으로 이동해 피맛을 보며 자란 뒤 허물을 벗을 때 떨어져 나은 성체 진드기.


멧돼지나 노루 몸을 숙주로 기생하다가 사람에게 붙어 라임병이나 중증열성혈소판증후군 발병의 원인이 된다는 진드기다.


제주도에선 실제 고사리 꺾던 여인네나 길고양이를 만진 중년도 진드기에 의한 감염으로 사망한 뉴스가 나왔던 터다.


뉴저지에 살 때 오월 단풍나무 숲에서 틱이 붙어 혼비백산한 전례도 있다 보니 무시라! 싶어서도 더는 고사리 채취 노댕큐!


본격 고사리철에 접어들 즈음 좀 다치기도 했지만 고사리 따러 같이 다니던 이웃에게 일찌감치, 더는 산에 다니지 않겠노라고 선언해 뒀다.


그녀는 안 그래도 고사리 입에도 안 대는데 그토록 열심 내는 게 이해불가였다며, 그럼 그렇지 아암! 단박 수긍했다.



여기부터는 지난해 일지다.


그토록 고대하던 연락을 받았다.


새벽같이 고사리 꺾으러 가는데 괜찮으면 동행하잖다.

와우~드디어 이웃인 삼춘 덕에 기회가 왔다.

그전부터 현지인에게 여러 번 물어봤지만 고사리밭은 그들만이 아는 비밀 장소로 꽁꽁 숨겨져 있었다.

하긴 고사리밭은 며느리에게도 알려주지 않는단다.

그만큼 토박이 프로페셔널 선수들끼리만 눈짓으로 통하는 은밀한 길이 고사리밭 가는 길이다.

하물며 뜨내기 외지인에게야 비장의 금맥이 묻힌 지점을 누설할 리가.

이 노다지야말로 한라산 너른 품이 베푼 시혜이니 당연히 현지인 몫.

봄 한철 재미 톡톡히 보는 그들만의 영업장소인데 노출시키려 하지 않는 걸 야박하다 할 수도 없다.

기술을 전수하지 않은 청기와쟁이 같은 심뽀를 욕심 사납다고만 나무랄 수도 없다.

제주도 고사리 가격이 그만큼 센 까닭이다.

통통한 제주 산 생고사리는 산지에서도 근 당 한우값보다 높다.

청정 자연에서 나는 무공해 제주 산 고사리는 전국 최고 품질로 꼽힌다고.

쫄깃한 맛에 풍미가 좋아 전국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터라 봄 한철 그 인기는 셀럽 급이다.

더구나 한철 수익이 그만이라 외지에서 고사리 채취하러 오는 전문 꾼들도 많다고 한다.

풍설로는, 고사리 철에 산길 도로변이나 갓길 따라 제주 번호판을 단 차량이 늘어서 있으면 틀림없이 고사리 스팟이란다.

중산간도로변에서 자주 목도한 바 있는 '고사리철 길 잃음 주의' 현수막을 보나 따나 안전사고도 빈번히 일어나는 모양.

고사리에 홀려 혼자서 자꾸만 숲 깊숙한 데로 빨려 들어가 종당엔 방향감각마저 잃고 황당지경에 이른다고.

아무튼 허름한 옷에 등산화, 목장갑과 토시 준비해서 비닐봉지에 챙겨 넣고 알람을 맞춰두었다.



이른 새벽 여명을 타고 한라산 어름 어딘가에 당도해 고사리 밭으로 들어갔다.

첫눈엔 메마른 잡풀만 뒤엉켜 있던데 차츰 시야에 하나 둘 고사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아가처럼 보얀 솜털에 싸여 주먹 꼭 쥐고 쏘옥 올라오는 고사리 햇순.

톡 꺾기 미안할 정도로 고사리 대마다 분질러지는 소리조차 연하디 연했다.

그러나 자꾸 따다 보니 그 소리는 스타카토로 톡톡! 물방울 튀는 양 투명하게 들렸다.

신새벽 해맑게 노래하는 새소리 더불어 마치 폴카 리듬을 탄 듯 기분 경쾌하기까지 했다.

이렇듯 오감만족 상태에다 사방에 고사리는 지천이니 고사리 따기야말로 신선놀음 아닌가 싶었다.

주로 해묵어 누렇게 시든 고사리 대들이 누워 있는 장소와 억새 마른 검질 쌓아 놓은 근처에 오동통한 고사리가 많았다.

양치식물은 응달에 흔할 거란 생각과 달리 양지바른 쪽에 줄기가 굵고 거무스름한 흑고사리가 천지였다.

고사리를 따는 동안은 일분 일초가 아까워 사진조차 찍을 새가 없었다.

몰아의 경지에 빠져 정신없이 고사리 자취 쫓아다니며 거의 허리만 굽혔다 폈다 반복하면서 노루나 토끼처럼 산자락 누볐다.

좌정하고 기도를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 해도 오만 딴생각 오락가락하는데, 그 순간 어쩌면 오롯한 삼매경에 들었던 건 아닐지.

삼춘이 일을 해야 할 시간이라 어지간히 해가 올라오자 우리는 그쯤에서 동작을 멈췄다.

차있는 데로 나와 군고구마에 뜨거운 율무차로 요기를 한 우리들.

수확은 다들 짭짤했다.

고맙게도 다행히 숲에서 비암은 만나지 않았고 도마뱀만 쪼르르 달아났을 뿐이다.(소름~유튭 내용대로다)

시내로 들어오자마자 우체국으로 직행, 언니네와 아들네로 생고사리를 부쳤다.

삶을 만한 그릇도 없을뿐더러 냉동실도 만원이라 알아서들 처리하라며 속달로 보냈는데 내일이면 도착한다고.

나야 본래 비빔밥에 든 고사리도 골라내는 식성이므로 땡처리 깔끔스레 잘했다.

원 없이 고사리도 따보고 귀한 선물도 보냈으니 이 얼마나 고마운 하루인가.

좋은 이웃인 삼춘 덕분에 고사리 체험 소원풀이한 첫날, 아침부터 맘껏 실컷 심봤다!

이른 기상에 따른 땜빵으로 낮잠 푸지게 자고 일어나 고사리 일지를 적었다.




●유튜브 내용의 신뢰성 여부와 상관없이 으이그 ~ 무셔라, 톡톡 분질러지는 아기 고사리 꺾어댈 일도 이젠 더는 읇어마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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