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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09. 2024

귀한 야생화 한라생태숲에 깔렸네

아들이 사진 하는 친구와 함께 지난 주말 남도에서 찍어왔다며 얼음새꽃을 보내왔다.새하얀 눈 속에서 금빛 윤기롭게 피어나는 꽃이다.


설날에 핀다고 원일초(元日草), 눈 속에 피는 연꽃 같다고 설연화(雪蓮花)라는 이름도 지녔다. 복 복(福) 자에 목숨 수(壽) 자, 복수초(福壽草)는 흔히 봄의 전령사로 불리는 야생화다.


봄소식 가장 먼저 알려주는 복꽃이니 뉘라서 반갑지 않으랴. 복 많이 받고 장수하라는 신년 문안인사가 담긴 복수초다. 다만 이름을 부를 때 앙갚음하는 복수가 떠올라 불편해서이리라. 하여, 노란꽃 송이 송이 오히려 용서의 꽃이라 부른 시인도 있었지.   


입춘도 한참 전에 지났으니 그렇다면 새해가 왔다는 꽃들의 신호 들릴 때도 됐지 싶었다.

대기 청명하고 바람 온화한 날씨라 지체 없이 한라생태숲으로 길을 잡았다. 기대감과 급한 마음에 심장이 표나게 두근거렸다. 그러나 요런 긴장감이야말로 쫄깃해서 즐길만하다. 생태숲 입구에 민들레인 듯 노란 꽃 몇몇 송이 피어있었으나 거들떠도 안 보고 일로 직진했다.


지난해 꽃이 폈던 장소를 알기에 곧장 숲 안으로 직진했다. 초입의 잘 생긴 구상나무마저 급한 볼일이라도 있는 양 휘리릭 스쳐 지났다. 아예 시선은 마른 풀숲에다 고정시킨 채로 숲을 찬찬히 훑었다. 어디에도 화사한 기척 전혀 없이 적막하기만 한 숲. 도대체 노란색은 흔적도 보이지 않았다. 조그만 낌새조차 찾을 길 없었다. 너무 일찍 서둘렀나 보군. 빗나가버린 기대에 맥이 좀 풀렸지만 절물오름 휴양지까지 삼나무 숲길 따라 걷다가 되돌아왔다.


연휴 끝나고 대보름 지나자마자 대설이 내렸으며 우수도 한참 전에 지났건만 또다시 한라산 윗녘 새하얀 면사포 쓴 날. 얼음새꽃이 하마 폈으려나? 성급히 생태숲을 찾았다가 눈 속 냉기로 된통 독감에 걸렸었다. 근 보름여 시난고난 몸져누웠다 일어나 보니 유채꽃 수선화 매화 함빡 피어났지 뭔가. 그래도 건강이 우선이다 싶어 몸 사리고 조심했는데, 오늘 아침 날씨 오래간만에 눈부셨다. 쏘다니던 버릇이 다시 도졌다.

일기 화창하다는 핑계로 오일육 도로를 넘었는데, 제주 기상도야말로 예측불허에 변화무쌍 그 자체다. 남쪽인 서귀포와 달리 불안스레 잿빛 구름에 잠식당해가는 하늘. 부드럽던 바람결은 매운 한겨울 북풍으로 변해 버렸다. 자연으로 나와 숲에 들면 마스크부터 벗어젖히는데 슬그머니 마스크를 되썼다. 솔바람은 쏴아 쏴, 나목 가지 휘저으며 윙윙대는 삭풍 차가웠다.

연못에 물비늘  잘게  흐르는 수석원을 지나 마른 갈대 잎 서걱거리는  수생식물원도 대충 둘러보고 돌아 나오는 길. 청량하게 재재거리는 멧새 소리 대신 고사목 높직한 우듬지에 앉은 까마귀 깍깍거렸다.

참꽃 봉오리 도톰해졌으나 아직 봄은 먼 듯, 한껏 움츠리고 있는 생태숲 빠르게 벗어났다.
차도가 있는 입구께로 나와 아까 본 노란 꽃에게로 다가갔다. 오오, 너였구나! 미안해, 바로 앞에 널 두고도 몰라봐서. 네가 바로 그 꽃, 내가 그리 찾아 헤맨 얼음새꽃일 줄이야!
산 너머로 파랑새를 찾아다녔지만 파랑새는 항상 우리 곁 가까이에 있었으니.


                                ***


재작년 봄, 난생처음으로 만나본 꽃들다. 눈밭에서 샛노랗게 피어나는 설중화 복수초와 가녀린 꽃 노루귀. 키 낮은 풀꽃에 앵글 맞추는 야생화 전문 사진가들의 사진을 통해서만 보았던 꽃이다.

생태숲 초입에 유독 빛나는 꽃이 있어 사진에 담으며 꽃 형태가 복수초를 닮았다 싶긴 했다. 하지만 복수초 잎새를 사진에서 본 바 없어 초록 이파리 소복한 그 풀꽃이 복수초인지 자신 없었다. 긴가민가해 검색을 해봤더니 그럴싸, 이번엔 확실히 하자 싶어 숲해설사에게 물어봤다. 복수초가 틀림없었다. 해설사 분이 덧붙이길, 새하얀 노루귀도 피어있으니 챙겨보세요.


한라생태숲으로 들어갔더니 백설 대신 누렇게 마른 풀숲 새새 복수초가 지천이었다. 마트에서 바겐세일하며 물품 대방출시키듯 인심 좋게도 온데 금화 깔린 듯 피어난 복수초. 다문다문 핀 노루귀도 양지볕살 즐기고 있었다.

키 낮추지 않으면 시선에 잡히지도 않게, 누런 가랑잎 새새 싸라기처럼 보일 듯 말 듯 점점이 핀 노루귀. 노루귀 가냘프면서도 고 앙증스러운 자태라니. 겨울의 잔해를 채 떨구지 못한 나목 천지인 한라생태숲 탐방은 복수초, 노루귀와 상견례 가진 것만으로도 충분히 흔감스러웠다.

때마침 시인 친구 전화를 받았기에 생태숲에서 복수초 완상하노라 했더니, 여기선 그 꽃을 얼음새꽃 혹은 눈색이꽃이라 부른다고 알려줬다. 제주 출신인 그녀는 섬에서 전해 내려 오는 얘기까지 곁들였다.
어린 손자가 겨우내 기침하며 골골대던 할머니에게 눈색이꽃을 꺾어다 드리며 새봄이 왔음을 알려드렸다고.

제주에서 피는 복수초는 세(細) 복수초로 눈을 삭히며 핀다 하여 눈색이꽃, 얼음 틈새로 피기에 얼음새꽃이라 한다지. 겨우내 기침하던 할머니에게 눈색이꽃을 꺾어와 새봄이 왔다고 알린 효손 모습은 민화처럼 빛바래 가는 세월이다. 살갑고도 정겨운 조손 간의 경은 시나브로 박제돼버린 먼 전설일 따름?

나이 들어서일까, 예전 울 할머니 바투게 해소 기침하던 모습 떠오르게 하는 눈색이꽃.
기나긴 겨울밤 베개로 가슴 공구고 지새우던 할머니는 어느 별자리에 드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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