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가 마감되는 주말.
항상 먼저 와 내 자리에 책을 갖다 놔주는 옆좌석 친구를 비롯, 몇 명을 집으로 초대했다.
그녀들은 영어회화가 사뭇 유창하므로 버벅거리는 나로선 수업 중에 도움받을 일이 적잖기도 하다.
급하면 자나 지우개도 빌린다.
클래스 성격상 학생들은 남미 출신 다수에 동유럽 시리아 이집트 중국 인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연령대는 이십 대부터 칠십 대까지다.
나이 지긋한 이들을 불렀는데 다들 국적이 다르다.
한국가정 방문도 처음이지만 한국음식은 생전 접해본 적이 없다며 다들 호기심 어린 눈빛들이다.
그렇다 보니 갑자기 민간외교사절 자격이나 된 듯 좀 더 잘 차릴걸 싶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거부감없이 좋아하는 요리는 잡채, 찌짐, 닭볶음탕, 불고기, 돼지갈비구이, 생선찜, 비빔밥 같은 메뉴가 무난한 편이다.
날씨가 추울 때면 어묵국, 떡볶이도 좋아라 반긴다.
이번에 마련한 음식을 일별 하면, 큰 접시 한켠에 밥 뜨고 스프 대용으로 따끈한 우동을 조금씩 공기에 담아냈다.
퓨전 구절판과 샐러드는 색채가 산뜻해 눈을 즐겁게도 하지만 소스나 양념은 따로 비치해
각자 입맛대로 알아서 먹을 수 있다.
한국식 피자인 두툼한 해물전에 한국식 피클인 오이지, 다시마부각과 뱅어포 튀김에 물론 김치도 내놨다.
구절판은 말 그대로 아홉 가지 재료가 들어가므로
일단 손은 많이 가지만 원가대비 비주얼만은 그럴싸~.
야채재료와 게맛살 계란지단 튀김어묵 닭가슴살을 키 맞추고 색 맞춰 썰어 모둠접시에 두르고 살짝 불김을 쐰 생김에 각종 재료를 싸서 겨자간장에 찍어먹는 화합의 음식 구절판이 메인이다.
작정하고 준비할 경우 새싹채소, 버섯, 죽순, 아보카도, 대하, 햄, 훈제오리, 쇠고기 등 다양한 재료의 어울림 한마당이 되는 구절판은 까다로운 채식주의자까지도 구애받지 않고 자기 식성 따라 골라먹을 수 있다.
그런데다 직접 손으로 싸 먹어야 하니 격식 없는 자연스러운 자리가 되므로 편하게 어우러지게 된다.
호모 사피엔스니 호모 루덴스니 하지만 인간은 누가 뭐래도 기본적으로 먹어야 사는 존재로
'밥 한번 먹읍시다'는 친밀한 관계이거나 오랜만에 만나 반가운 사이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소리다.
음식이라는 매개체를 사이에 두고 유쾌하게 같이 어울리고 싶다는 얘기이자 한자리에 앉아 함께 시간을 나누고 싶다는 의사 표현이기도 하다.
'음식 끝에 정 난다'란 말이 있는가 하면 '음식 끝에 마음 상한다'란 말이 괜히 생겼겠는가.
요즘은 구절판이라면 폐백음식으로나 겨우 구경하지만 예전엔 엄마가 특별한 날이면 솜씨 부려 만들어 낸 음식이 바로 이 구절판이었다.
칠기 목함에 여러 재료를 색깔 맞춰 돌려 담고 중앙에는 밀전병을 얇게 부쳐놓아 입맛대로 이것저것 전병에 싸 먹었던 오래전 기억.
쌈 거리로는 전병만이 아니라 무쌈으로 대신하거나
월남쌈 식으로 라이스페이퍼를 이용할 수도 있다.
후식으로 과일 외에 한국산 초코파이, 후렌치파이, 싸만코(붕어빵), 거기다 보이차를 준비했더니 차맛보다 진기하게 생긴 다기에 더 흥미로와들 했다.
차를 마시며 여러 화제들이 올랐었지만 특히 과테말라인인 애나의 푸념을 통해 인간사 어디나 게서 거기 다 비슷하며 사람 사는 모습은 오십보백보임을 거듭 느꼈다.
동서양 어드메를 막론하고 여자들의 수다 중심에는 남편얘기가 빠질 수 없는가 보다.
나이 어지간히 들면 괜한 허세나 자랑질보다 너 남 없이 그냥 무장해제, 속내 허심탄회하게 풀어놓는다.
어찌 보면 넉살 좋은 뱃장에다 자못 뻔뻔스러워지고 얼굴 두꺼워져 별로 남세스러울 게 없어진다고나 할까.
애나의 남편은 은퇴 연배인 지금이야 그렇다 쳐도 평생을 일보다 놀기만 즐겨온 사람으로 허구한 날 술타령에 먹는 타령이란다.
그렇게 집에서 빈둥거리는 남편꼴 보기 싫어 피신차 매일 학교 나오는 거라면서 쉴 새 없이 신세한탄을 하는데 거의 오후시간 내내 그녀의 독무대,
하여, 그녀야말로 제대로 후련하게 속풀이를 했으니 모처럼 확실한 힐링타임을 가졌노라며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한 달에 한번, 다음번엔 동네 뷔페식당에서 수다모임을 갖기로 즉석 결의했다.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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