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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1. 2024

정원 꾸미기

가끔 한적한 골목길을 걷는 때가 있다. 그렇다고 산책이나 운동 삼아 걷는 것은 아니다.

이를테면 절에 다녀오는 길이라든지 우체국에 갔다 오며 시간과 마음이 함께 넉넉할 경우.

특별히 바쁜 일 없고 따로이 볼일 없을 때는 발길 역시 저절로 한유롭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다. 두리번거리거나 주춤거릴 필요도 물론 없다.

그저 눈에 띄는 대로 담장이나 문패 같은 걸 별 의미 새기지 않고 바라보며 걷는다.

어느 건 한참 서서 지켜보기도 하지만 일별해 스치는 게 대부분이다.

자주 보는 것이라 새로울 것도 신기할 것도 없는 풍경들이니까.

 

열린 문이 있다면 슬쩍 안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혹여 내 태도에 수상쩍은 눈꼬리를 따라 붙일 이는 없으리라.

나와 초면인 어떤 사람이 인상이 아주 선량해 보인다며 크리스천이냐고 물은 적이 있음을 상기해서다.

하긴 순하게 보인다는 건 어리숙하다는 뜻도 포함되지만.

어쨌든 나는 단지 정원 가꿈을 보기 위해 들여다보았을 따름이므로 거리낄 게 없는 셈이다.

 

담에 줄장미나 등덩굴 혹은 담쟁이라도 늘여진 집은, 그래서 초록빛 물결에 파묻힌 것 같은 집은 어쩐지 정이 간다.

그 집에 살고 있는 이들은 다 착한 이웃일 것만 같다.

완강히 버틴 철대문이 아닌 결무늬 살린 나무 대문이거나 아라베스크 섬세한 무늬 아른거리는 그런 대문은 한참을 바라본다.

즐거운 얘깃거리가 그 손잡이에서 달그락거리며 새어 나올 것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어떤 집은 옆집에 사는 강아지라도 뛰어넘을 만큼 나지막한 붉은 벽돌담을 둘렀다.

그 너머로 정원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게 언제 봐도 참 살갑다.

대문에서 현관에 이르는 길 따라 하얗게 깔린 조약돌.

양옆으로는 줄지어 소담스레 가꾼 실난의 청초함이 순결한 소녀를 연상케 한다.

 

반면 잔뜩 키 돋워 담을 쌓고 그래도 못 미더워 철창으로 중무장한 집을 보노라면
불신이 팽배한 세태를 읽듯 마음에 바위가 얹힌다.

하긴 핏발 세워 지켜야 할 부(富)란 늘 가진 그 양만큼 불안한 것.

하여도 스스로 갇혀 사는 구속마저 기꺼운 양

여전히 물욕의 허상을 쫓는 사람들이 많은 세상이다.

가치관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다르긴 하겠지만,

부를 무조건 경멸하거나 추종하지는 말되 결국 인정하긴 해야 할 그 양면성이 아닌가.

 

내 마음부터 세척하라는 뜻일까.

홀연 스미는 향 따라 시선을 드니 골목 모퉁이에 은목서 하얗게 피어 있었다.

은목서 맑은 향에 젖은 채로 나는 속으로 가만히 우리 집 정원을 꾸며보기 시작했다.

아파트에 사는 현재로선 그냥 꿈일 따름이지만,

나이 들어 대구의 부연집 그 한옥에 돌아가 살 땐 이런 정원을 만들어야지 생각하면서.

 

뜰을 반쯤 가린 라일락은 그 자리에 언제나 그대로 두고

오월 아침 눈 내리듯 피어나는 찔레 향도 그냥 두리라.

등나무 왕성한 줄기는 가끔 전지로 다듬고 겹무궁화 한 그루 그땐 제법 밑동 굵어 있겠지.



새로 심을 나무론 먼저 자귀나무.

그리하여 외가의 따뜻한 추억과 더불어 무시로 고운 부채춤사위를 떠올리리라.

그다음엔 동천(冬天)에 푸른 향 띄우는 비파, 귀골의 태산목도 심어야지.

자손이 잘 된다는 대추나무에 알알이 보석 품은 석류나무, 늦가을 홍시 매단 감나무도 가꾸리라.

토담 가 홀로 붉던 앵두는 낮은 키 유념하여 앞켠에 심고

백옥 송이송이 향 서린 치자나무도 심자.



목련은 굳이 산목련을 택할 것이다.

조촐한 모양새로 소심(素心)을 일러주는 산목련화가 나는 좋으니까.

다감한 백일홍, 뭉게뭉게 소담스러운 불두화, 담 따라 구기자 덩굴도 오르게 하리라.

그 아래 작은 샘솟으면 하마 누가 아는가, 천수 누리는 신선이 게서 날는지.

 

잔대나무 심어 가을 저녁 댓잎 바람도 청하리라.

봉황은 아니 기다려도 달빛 거르고자 벽오동도 심어야지.

나목이 떨고 선 겨울, 빈 가지 사이로 청청한 푸른 잎 산호수며 월계수도 가꿔야지.

몸서리쳐지도록 붉은 정열 동백도 심어볼까.

그러나 동백은 반드시 소박한 토종 동백이어야 한다.

 

귀여운 개나리, 선은 기하학 멋진 모과나무, 하긴 천리향도 갖고 싶다.

그건 자리가 남았을 때 생각해 보자.

허나 여백도 있어야 하고 앉아 쉴 만한 한두 점 찬 바위도 필요하다.

잔디를 심어 그 새새 민들레 클로버 반지꽃도 피게 해야지.

고흐의 황금빛 햇살과 더불어 푸르른 달빛 고요히 내리게 하리라.

벌, 나비는 물론 멧새도 청하리라.

 

석등이며 수련 뜬 연못의 호사까지야 못 누린다 해도 이만큼은 가멸진 정원을 갖고 싶다.

그러나 무엇보다 내 마음의 정원 가꾸기에 소홀해선 안될 일이다.

 행여 탐심으로 수목 어수선해지거나 태만으로 잡초만 무성하다면 얼마나 부끄러울까.

 

'인간의 가치는 무엇을 가졌느냐에 달려 있지 않고 어떤 인간으로 존재하느냐에 있다'란 말씀이
깊은 울림으로 골목길 어디선가 들려오는 것 같다.        - 88년 1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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