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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1. 2024

로마의 소나무

가늠조차 겨운 우주는 내가 거론할 몫이 못되오. 우주는커녕 이 지구는 또 얼마나 무한한지요. 어느 여름, 까마득하고 거대한 로마 역사 앞에 서서 찰나에 다름 아닌 내 삶과 티끌에 불과한 내 존재에 대해 연민마저 느꼈소이다. 동시에 겸손해야 할 이유를 거듭 확인한 것이외다.

그랬소이. 수많은 유적의 엄청난 양과 규모에 압도당하고 질리다 못해 얼떨떨해지는 곳이 로마였소. 마치 꿈처럼 환영처럼 잠깐만에 흘러가 버린 영상인 로마. 오래 그리던 정인을 만나 살몃 손 맞잡기도 전 허망히 깨어버린 꿈, 혹은 스치고 지나간 여름날의 강바람인양 못내 아쉬움이 남는 로마라오. 트레비 분수에 동전을 던진 것은 치기였을망정 잘한 일이었소.


이틀간의 일정으로 로마의 무엇을 보았다 하리오. 그냥 바람맞은 여자처럼 마구 거리를 헤매 다녔다는 것이 적절한 표현일 거요. 로마의 이름 모를 골목과 언덕길 폐허 사이를 종일토록 헤매느라 족히 삼십 리 걸음은 한 듯하다오. 그렇게 돌아다니며 눈에 넣은 풍물 중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거라고는 잘 생긴 소나무를 보았다는 것이오. 음악을 통해 이미 수인사를 튼 바 있는 로마의 소나무가 곳곳에서 귀태스런 수형으로 늘씬하게 뻗어올라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소. 하고많은 유적지를 노래하지 않고 소나무를 주제로 삼아 이탈리아적인 감미로운 선율과 환상미가 어우러진 교향시를 남긴 레스피기. 로마에 닿아 소나무와 상면하는 순간 그 까닭을 알 수 있을 것 같았소.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는 네 부분으로 이루어진 서정적인 교향시라오. 상쾌한 결미가 감칠맛 나는 <보로게제 별장의 소나무>. 정적에 가까운 어둠의 표현이듯 장중하면서도 몽환적인 <카타콤베 부근의 소나무>. 달빛 고요한 밤 <자니콜로의 소나무>는 테레베 강을 굽어보며 서정에 취해 있었지요. 충격적인 힘찬 리듬이 전율 일게 하는 <아피아 가도의 소나무>는 옛 로마의 영광을 찬양하듯 화려하고 격정이 넘쳤더랬소.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고 외친 로마인의 자긍심을 읽을 수 있는 흔적들이야 도처에서 만날 수 있었소. 베드로 성당 둘러보며 그 어마어마함에 넋을 잃다가 바티칸 미술관 찾아 '천지창조' 일별하고 부지런히 판테온으로 가 거대한 돔과 석주를 기웃거리는 일뿐이겠소. 고대 로마인의 생활 중심지였던 포로 로마노의 폐허 마주하고 감회에 젖어보다가 검투사의 피비린내가 스민 콜로세움에서 길고양이 떼에 놀라기도 하였소. 다시 바삐 아피아 가도 달려 물고기가 새겨진 카타콤베로 내려가 서늘한 기운을 느껴보는 일. 엠마누엘레 2세 기념관 배경으로 사진 한판 찍은 다음 서둘러 스페인 광장 층계 오르며 아이스크림을 핥고.....공식화된 로마에서의 일정표 그대로이지요.


그러나 핍박받던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티누스의 개선문에 새겨진 정교한 부조는 정녕 놀라웠지요. 상수도 시설이 완벽했기에 가능했던 도처의 분수대, 아기자기한 정원들도 오래 발길을 묶었더랬소. 칼리스토 지하 공동묘지 건너에 있는 쿼바디스 성당은 조촐함으로 오히려 강한 인상을 남긴 곳이라오. 박해를 피해 신도를 버리고 숨을 자리를 찾던 베드로 앞에 예수님이 나타났고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 묻는 베드로에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러 간다”라고 답한 예수. 그 말씀에 로마로 발길을 되돌린 베드로는 순교를 당하고 말았다는데 베드로가 예수를 만난 바로 그 장소에 지은 성당이 쿼바디스 성당이라 하였소. 또 한 곳, 로마제국의 공화정 시대 원로원과 공회당, 신전 등이 폐허로 남은 포로 로마노는 팔라티노 언덕의 넓은 터에 산재한 채 삶의 덧없음을 보여주고 있었소.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전설 속의 인물, 로물루스가 처음으로 도시를 건설한 곳 또한 여기였다 하오.


도시 자체가 고대의 역사이고 도시 전체가 고대의 기념물인 로마. 인간의 끝 모를 욕망이 권력의 오만과 결탁, 노예를 혹사하여 이리도 거대한 힘을 부려놓았던 거지요. 거기에 종교와 예술이 아주 멋들어지게 어우러졌고요. 과거의 모습이 고스란히 녹아있는 역사의 거리 로마는 그러나 현대의 활기찬 생활과 공존하며 이 시대의 방식대로 살아 숨 쉬는 건강한 도시였소. 고유 브랜드 제품만 취급하는 고급 쇼핑가인 상업 지구가 시내 중심부를 이루었으며 자동차와 패션을 수출하는 나라. 무엇보다 위세 당당한 조상 덕에 큰 힘 안 들여도 저절로 쏟아져 들어오는 관광수입이 굉장하다는 로마가 아닌가요. 반면 관광객의 주머니를 노리는 소매치기가 극성스럽고 길거리에 아무렇게나 쓰러져 잠든 부랑아도 심심찮게 눈에 띄었소.


제아무리 위대한 인간의 능력일지라도 결국은 시간 앞에 무릎 꿇지 않는 게 무엇이던가요. 굳은 돌마저 시나브로 삭아내려 無로 돌아가게 하는 보이지 않는 힘, 로마는 도처에서 그걸 증명하고 서있었던 거였소. 서투른 복원이나 새로운 치장을 하지 않고 억지 보존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럽게 마멸되어 가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로마. 하여 로마는 어제의 로마가 아니고 어쩌면 매번 낯선 로마로 우리를 맞아주는 지도 모를 일이오.


역사의 거리에서 눈치채지 못할 만큼 조금씩 늙어가고 있을 로마의 소나무. 문득 그 솔바람 솔향이 그리워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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