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창 장마철인 함안의 산하는 한껏 짙푸르렀다.
눗누런 밀밭과 모내기 마친 논두렁이 조각보처럼 대비 이룬 들판은 넉넉했다.
그 땅의 정신과 인심이 미루어 짐작됐다.
"함안조씨는 말석(末席)에 앉아도 양반(兩班)”이라는 자긍심 남다른 고장.
명문가라 자부하는 함안 조 씨의 집성촌이다.
걸출한 학자나 대문장가 못지않은 명문 가계의 요소가 또 있다.
바로 뛰어난 충절인 바, 이 가문에서는 유독 충의열사가 많이 배출됐다.
고려 말 두문동(杜門洞) 칠십이현(杜門洞七十二賢)으로 일컬어지는 어른이 세 분이나 된다.
계유정난 이후 불사이군(不事二君)의 고결한 지조를 지킨 생육신의 한 분인 어계 조려 선생도 있다.
왜란과 호란이 터지자 앞장서 충의정신으로 살신보국하신 열세 분 기록도 비문에 새겨졌다.
이와 같이 고려 말부터 조선조에 거쳐 유달리 올곧은 충신이 많았던 가문이다.
그래서인지 함안 조 씨 시조의 관향인 본관답게 함안에는 명문가의 자취가 처처에 남아있다.
길을 지나다 보면 흔히 눈에 띄는 게 고택이요, 누각과 정자며 유허비와 홍살문 또한 자주 목격된다.
누각과 정자가 유난히 많은 함안이라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찬찬히 둘러보러 와야 할 듯.
연꽃 필 즈음이면 연화 축제도 열린다니 겸사겸사 하루 날 잡아 아라가야 고분군도 구경해 보기로.
서산서원에 딸린 채미정(菜薇亭)은 서원과 한 마장 거리를 두고 지어진 조선조의 누정이다.
곧은 충절 지키고자 낙향해 은둔한 선비의 정자답게 맑은 기운이 감돌면서 조촐한 아취를 풍긴다.
한나라 군주만을 모시겠다는 절개 지키려 수양산 깊이 은거해 고사리만 꺾어먹으며 지냈던 형제.
고사리조차 주나라 산물이라는 말에 아사를 택한 백이숙제의 고사가 전해져 내려온다.
이처럼 산촌에 숨어 고사리를 뜯는다는 채미정 편액과 불사이군 충절의 기개 백세청풍으로 기려 현판에 새겼다.
다소곳 질박한 누정에 비해 대필로 굵직하게 쓴 '百世淸風' 서체가 호방하다.
피로 얼룩진 불의가 정의를 휘덮던 당시나 지금이나 백세 지나도 여전히 요원한 푸른 바람이긴 마찬가지이나.
채미정 후원 송림에 둘러싸인 청풍대 위에 보이는 문풍루는 육각형 정자로 여섯 분의 생육신을 상징한다고.
생육신 중 한 분인 어계 조려 선생은 단종을 내친 세조를 받들지 못하겠다며 벼슬을 버리고 낙향한다.
대쪽 같은 결기가 시퍼러이 살아있을 것 같으나 채미정은 참 조신한 품새다.
기상 돌올한 대신 소심할 정도로 다소곳하니 음전스럽다.
연중 개방되어 있는데 웬일로 특별히 관리하며 지키는 이가 없었다.
집을 누가 짊어지고 갈리야 없지만 목조건물의 특성상 작은 불씨도 조심해야 겠기에.
창호지 정갈하게 바른 방문이며 네 귀퉁이 처마마다 정성스러운 조각이 들어있어 볼수록 단아한 집.
1693년에 창건했으나 1954년 재단장을 했다고 써있다.
은은히 나뭇결 드러나는 기둥 쓰다듬으니 목향 번지는 듯, 맞바람 넘나들어 더없이 청량하다.
팔작지붕 겹처마에 측면 세 칸, 정면 네 칸 중 중앙에 방을 들였으며 뒤쪽에 난방을 위한 아궁이가 있다.
누마루에 한나절 걸터앉아 있으면 시 몇 소절 풀려나올 것 같은 고매한 아취 풍기는 정자다.
다만 옥에 티처럼 거슬리는 부분도 없잖아 있다.
좁다란 뜰에는 둥근 연못 깊은데 부조화를 이루는 시멘트 다리 영 어색하다.
뒤란 쪽으로 돌아 절벽 위 청풍대에 오르면 언덕을 감싼 소나무 점잖으나 문풍루라는 육각정 혼자 뜬금없이 홀로 붉다.
그래도 전망만은 오밀조밀, 나지막한 동산 아래 펼쳐진 들판의 옥답 평화로웠다.
채미정에서 과히 멀지 않은 들판길 한편.
조정을 떠나 고향에 돌아와 여생을 보낸 금은 조열선생 고택 대문채 늠름하다.
거문고와 시서화에 능한 고려 말 충신이었던 조열.
공양왕 때 공조전서를 지낸 분으로 이성계 부자를 견제하라 수차 조정에 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자 낙향했다.
함안에서 은거 중 고려가 망하며 공양왕이 사사되자 통곡하면서 3년간 喪服을 입었던 그.
이성계의 부름에 끝내 응하지 않아 핍박을 당했던 선생의 고택과 신도비가 모셔진 도로를 지난다.
이 가문의 또 한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의병활동을 하다가 장렬히 전사한 조종도,
남명 조식 문하에서 수학한 대소헌 조중도는 송암 김면과 내암 정인홍과 더불어 의병대에 앞장섰다가 1597년 함안 황석산성에서 최후를 맞는다.
이에 그의 부인도 따라서 자진하자 두 분 신도비는 쌍절각에 모셔졌다.
정려문 대신해 고색창연한 비각 앞에 세운 정려각 붉은 단심이 옷깃 가다듬게 하였다.
위치: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 사군로 1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