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을 거의 한 달에 걸쳐 어거지로 읽었다. 역자 혹은 출판사가 신통찮은 탓인지 아무튼 문장 흐름이 시원찮아 읽어내기가 쉽질 않았다. 힘들게 그 책 마지막 장을 덮은 뒤 곧바로 장정 산뜻한 신간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는 날밤 새워가며 공지영의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을 읽었다. 그랬다. 꼬박 새벽 4시까지 보고야 말았다. 장편임에도 단숨에 읽어 내릴 수 있는 소설이었다. 名不虛傳, 과연 명성은 그냥 저절로 얻어지는 게 아님을 실감했다. 사실 초기 소설 '무소의 뿔' 시대의 그녀 스타일을 나는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녀 소설을 한번도 옳게 읽은 적이 없었다. 거기다 오랜만에 기이한 현상도 일어났다. 책을 읽으며 여러 차례 눈물을 흘렸던 것은 물론 자꾸만 가슴이 메여오던 것도.
주제는 용서다. 사랑이 아닌 용서를 다뤘는데 처연하게 아름답고도 슬펐다. 용서.... 용서.... 일곱 번이 아니라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 곧 끝없이 용서하라 했지만 그게 어디 그리 쉽던가. 주의 기도문에도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하시고....' 허나 용서가 말처럼 그리 쉽다면야 도대체 뭐가 문제랴. 원수를 사랑하라, 의 깊은 뜻은 나를 힘겹게 하고 나에게 해악을 끼친 이조차 용서하란 얘기다. 과연 그게 생각처럼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던가. 죽어도 용서할 수 없을 것 같아 입 앙다물게 만드는 대상, 내심 시퍼러이 복수의 칼을 갈며 증오하고 저주해 온 사람을 위해 기도한다는 것은 결코 용이한 일이 아니다. 영화 <그리스도의 수난>에서 나오는 대목, 채찍질과 조롱을 받으며 피를 철철 흘리던 예수. 마지막 십자가상에서 예수는 진정으로 위대한 '말씀'을 남긴다.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하는 일을 모르고 있습니다."
소설은 각 종교단체에서 부르짖으며 이슈화되고 있는 사형제 폐지를 바닥에 깔고 있다. 태어남도 그러하지만 죽음의 순간 또한 인위적으로 어찌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아무리 극악무도한 범법자일지라도 억지로 생목숨을 끊게 하는 일만은 하지 말자는 취지다. 죄질이 나쁘면 나쁠수록, 악독한 죄를 저지르면 그럴수록 그 죄를 저지른 순간 이미 그들은 살아있다 해도 죽은 거나 진배없는 목숨이다. 인간에게는 양심이란 게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인간이란 존재는 본질적으로 선하기만 한 존재도, 악하기만 한 존재도 아니라 저마다 성과 속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이중적 존재이긴 하지만 말이다. 게다가 타고난 성격은 감정과 사고와 행동에 지속적으로 영향을 미친다.
아기 때는 누구라도 티 없이 순수하고 흠없이 깨끗해서 다 천사 같다. 좋고 나쁜, 선하고 악한 유전자가 따로 있는 게 아니라 태어날 때 인간은 다 같이 하얀 백지상태로 이 세상에 온다. 인간은 창조자인 신이 70%를 만들고 나머지 30%는 태어난 다음 부모가 그 부분을 채워서 옳은 인간으로 완성시킨다고 한다. 이렇듯 주위 환경에 의해 인간은 다듬어지고 최종적으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헌데 어린 시절에 사랑받지 못하거나 감정적 신체적인 학대를 받은 아이는 뇌의 5~10% 정도가 망가져버리고 만다고 한다. 폭력 같은 학대나 방치는 물론 배고플 때 젖을 물리지 않거나 젖은 기저귀를 제때 갈아주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안아주고 눈 맞춰주는 따스한 사랑이 없을 때도 아기는 애정결핍으로 인해 뇌 발달이 순조롭지 못하다는 얘기다.
그렇게 자란 아이들은 남의 아픔에 무감각한 공감능력 결여에다 충동에 대한 조절기능도 약할뿐더러 타인의 행복을 배 아파하는 등 말하자면 소나무 옹이처럼 비비 꼬여 매사 삐뚤게 본다는 거였다. 이는 소설 속 정신과 의사의 진단서 소견 내용 중에 나오는 말이다. 그런 사람은 결국 손상된 엔진을 달고 다니는 자동차 꼴이니 언제 사고가 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 어느 순간 터질지 모르는 활화산 격인 것이다. 그 같은 사람에게 필요한 치료약은 오직 사랑이라는데 그러나 사랑도 받아본 사람이 사랑을 할 줄 알고 줄 줄도 아는 법. 결국 원만한 부모슬하에서 자라지 못한 사람은 정신적 불구자가 될 소지가 다분, 따라서 가정을 이끄는 모든 부모들이 유념하여 새겨둘 대목이다. 행복한 가정을 유지하는 것은 가족의 정신건강 나아가 사회에 해가 되는 암적존재를 키우지 않는 것이 되니 그야말로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닌가.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희생이 필연적으로 따르게 되는데 이때 기꺼이 자신을 죽이는 자, 땅에 묻혀 썩고 마는 한 알의 밀알이 되는 이가 있어야 한다. 그 자리는 대부분 어머니 차지다. 성자가 달리 성자인가, 한없이 낮아지고 또 낮아진 채 밟히고 밟혀가며 그렇게 자신을 송두리째 내어주는 사람이 성자다. 소설 속에서 여러 성자들이 등장한다. 자기 딸을 무참하게 살해한 살인범을 용서하는 모정은 소설이니 가능할지 모른다. 아무튼 수녀님이 가르친 용서란 단어를 그녀는 몸소 실행한다. 그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이 평생을 가난하게 살아온 노파였다. 다만 범인이 동생하고 단 둘이 고아로 불쌍하게 자란 사람이란 그 배경을 이해하고 가슴 아파하며 끼니때마다 한 수저씩 모은 쌀로 떡을 만들어 면회도 간다. '네가 착하게 생긴 게, 네가 떨고 있는 게 나를 더 힘들게 한다' 며 왜 그랬냐고 울부짖던 그녀는 용서하려고 왔는데 막상 널 보니 멱살이라도 잡고 싶어 져 미안하다는 말을 흘리면서 고개를 떨군다.
콧등이 찡해지며 가슴 먹먹하게 하는, 종내는 주르륵 눈물 흐르게 만드는 그 말, 미안하다는 한마디 그 말이 그토록 서러운 말인 줄 처음 알았다. 희한하게도 제 죄를 모르는 사람일수록, 그래서 참회할 줄 모르는 사람일수록 그 입에서는 미안하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뿐인가, 뻔뻔스러이 하늘 무서운 줄도 모른다. 여전히 가시 박힌 얘길 하는 나는 역시 아직도 용서할 수 있는 자비의 은총을 받지 못한 죄인. 용서는 자기가 하고자 노력해서 되는 게 아니라 하느님 은총의 선물이라 하지 않던가. 우리가 할 수 있는 몫은 원망과 미움의 감정을 내려놓는 노력뿐이다. 자신을 위해서도 은총의 그 선물을 받고 싶다. 아직도 용서하지 못한 그 무엇과 이쯤에서 정녕 화해하고 싶은 것이다.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