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용복, 홍순칠, 박종우, 김장훈까지

by 무량화

응당 대한민국 영토는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의 영해 영공을 포함하는 것으로 되어 있으니 국가가 주도적으로 지켜야 할 우리의 땅 독도다. 1952년 재빨리 이 대통령은 우리나라 연안수역 보호를 위해 해양주권선인 평화선을 그어놨다. 우리나라 해안에서부터 평균 60마일에 달하는 수역에 포함된 광물과 수산자원을 보존하기 위하여 설정한 것. 이에 일본이 크게 반발, 수차 마찰을 빚어왔다. 그러나 국제정치와 외교의 달인 이박사가 아닌가. 이후 혁명정부가 들어서며 김종필과 오히라 외상과의 한일협상 결과로 몇 억불 푼돈에 숱한 현안들은 파묻혀 버렸다. 거기에 독도도 포함됐다. 하긴 한국 정부 1년 예산의 3분의 2가 미국 정부의 원조로 충당되던 당시로서야 한 푼이 아쉬운 형편. 더구나 남한은 북한의 약 22% 수준의 경제 규모를 가졌다고 평가되던 때다. 새마을 노래를 부르며 온 국민이 경제성장에 박차를 가하던 시기라 그렇다 치자. 사실 열외의 사안들에는 거의가 관심을 껐다. 결국 역사 흐름 상, 독도 지킴이는 국가가 아닌 민간인일 수밖에 없었다. ​안용복, 홍순칠, 박종우, 김장훈 같은...



걸핏하면 한 번씩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며 속을 긁는 일본의 망언으로 온 국민이 양은 냄비 끓듯 바르르한 것이 여러 수차례. 그때마다 우리는 목청껏 독도는 우리 땅, 독도를 지키자는 구호를 힘차게 외쳐 댔다. 감정적인 대응만이 아니라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명확한 역사적 사실을 입증할 수 있는 여러 반박자료를 제시하기도 했다. 우리나라가 세계지도에 처음 등장한 것은 1154년의 일. 신라라고 표기된 아랍의 알 아드리시 지도가 최초라 한다. 이후 1680년에 만들어진 샤틀랭의 아시아 지도에서 MEA ORIENTALE로 표기되었고 영국의 몰, 프랑스의 벨렝 등 주요 지도에 MEA DE COREE라 쓰여있다. 일본 역시 명치 초기까지 동해를 조선해라 칭했다.



이미 5세기 때부터 우산국의 땅이었던 독도. 신라의 이사부가 우산국을 정벌해 신라에 귀속시키니 그때가 512년. 천오백 년 전 삼국시대에 우리 땅으로 이름 지어진 독도인 만치 당연히 서양의 옛 지도에도 우리 영토로 표기돼 있다. 뿐 아니라 19세기 일본 해군성이 발행한 해도에까지 한국 영토로 명시돼 있는 독도다. 단지 미 국무부 극동담당차관보인 딘 러스크 각서를 들이미는 일본국. 우리가 일본의 지배하에 있던 1905년 무인도인 독도를 제멋대로 시네마 현에 편입시켜 죽도라 부른 궁색스런 근거 밖에는 갖고 있지 않은 일본이다. 그럼에도 한사코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속셈은 영해와 다름없는 여러 권리를 누릴 수 있는 2백 해리 경제수역 선포와 관련해서다.


부산 수영성에는 사당까지 아우른 그의 사적비가 있다

안용복(安龍福), 그는 조선시대 수군으로 사적의 갈피에 파묻혀 거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갑남을녀의 한 사람인 평범한 백성이었으나 진작에 변경(邊境)의 중요성을 인식한 선각자적 혜안이 돋보이는 그. 역사에 뚜렷한 기록으로 남겨진 이름은 아니지만 이처럼 의식 있고 슬기로운 민중들로 해서 국경선이 지켜져 왔으니. ‘동해 밖에 한 조각 외로운 섬, 아무도 내 땅이라고 돌아보지 않을 적에…’ 안용복의 충렬을 기리는 이은상의 헌시가 새겨진 충혼비가 부산 수영공원에 있다. 그는 동래 땅 남촌, 지금의 수영 출신으로 숙종 19년 봄, 어민들과 어울려 울릉도 부근으로 고기잡이 나갔다가 일본에 잡혀간다. 몇 해를 억류된 채 지내온 그는 어학에 능한 자질인지 곧 일본어를 익혔다. 일신 보존조차 어려운 입장임에도 그는 막부에 나가 울릉도는 우리 땅임을 당당히 주장, 마침내 그들을 설득시켜 도쿠가와막부가 승인하는 서계(書契)를 받아 낸다.



귀환 길에 대마도주에게 서계를 빼앗기고 구금됐다 풀려나 겨우 고향에 돌아오나 그를 기다리는 건 옥살이. 허가 없이 국경을 넘었다는 죄목이다. 이태에 걸친 옥고를 치르고 나와 보니 일본 어부들이 울릉도 근해를 주름잡으며 멋대로 행패 부린다는 말을 듣고 지체 없이 일본으로 건너가 따지고 든다. 하여 막부는 숙종 23년 2월에 정식으로 동래부사 이 세재에게 이를 인정하는 서계를 보낸다.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애국자이자 노회한 민간 외교관이었던 그였지만 또다시 무단으로 나라 밖을 넘나들었다는 죄로 처형 위기에 이른다. 이에 조정의 남구만 등 원로대신의 간곡한 탄원으로 겨우 사형은 면하고 귀양살이로 일생을 마친 안용복.


홍순칠, 해방 후 독도를 지킨 건 예비역 특무상사 홍순칠과 33인의 민간인이었다. 홍 씨는 전쟁을 틈타 독도를 제집 드나들듯 하던 일본인들을 몰아내기 위해 의용수비대를 조직했다. 1952년 독도 동쪽에 그은 '이승만 라인'이라는 평화선도 아랑곳 않고 독도 주변에서 선진 어업기술로 고기를 싹쓸이해 가는 그들을 보다 못해 의연금을 모아 기관총 박격포 등을 구입하고 의용대도 모집했던 것. 수비대는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함정의 침범을 두 차례나 격퇴하는 등 독도 수비에 앞장섰다. 수비대를 물러난 뒤에도 독도 개발계획서를 만들어 독도의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도록 국가에 재촉했다. 그러나 그의 열정을 부담스러이 여긴 정부, 전두환 정권은 독도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해 민간인 출입을 막았다. 심지어 노래 ‘독도는 우리 땅’을 금지곡으로 지정했다. 결국 고문 후유증으로 홍 대장은 1986년 숨졌다.


왜인가? 1962년 김종필과 일 외무장관 사이에 맺어진 청구권 밀약 이후 1965년 정일권 국무총리와 일본 자민당의 실력자 우노 소스케 의원이 한 장의 메모에 사인을 했다. ‘미해결의 해결’이란 원칙에 따라 성안 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독도밀약이었다. 첫째, 독도는 앞으로 대한민국과 일본 모두 자국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반박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둘째, 어업구역을 설정할 경우 양국 모두 독도를 기점으로 확정하되, 중복되는 부분은 공동수역으로 한다. 셋째, 현재 대한민국이 ‘점거’한 현상을 유지한다. 그러나 경비원을 증강하거나 새로운 시설을 증축은 하지 않는다. 급한 김에 처리시킨 미봉책에 불과하나 일단은 일본이 한국의 실지 지배를 암묵적으로 인정한 셈이다.(노 다니엘 저 <독도밀약>) 독도 밀약 일주일 뒤 1년 넘게 교착됐던 정상회담 예비회담은 재가동됐고, 한-일 협정이 체결됐다. 함께 발표된 한-일 어업협정은 독도 주변 해역을 공동규제수역으로 규정했다. 밀약 내용 그대로였다. 공동규제수역 혹은 중간수역 규정은 지금까지 지켜진다. 밀약도 밀약이지만, 당시 정권마다 일본 정부와 민간에게서 막대한 정치 자금을 받았다. 박정희는 일본 민간기업으로부터 정치자금을 받았고, 전두환 정권은 출범하자마자 일본 나카소네 정부로부터 40억 달러의 차관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니 독도를 물고 늘어지는 홍 대장을 가만두기 어려웠을 것이다.



위키백과에서는 독도 분쟁은 20세기 이전, 독도에 대한 지배 및 관할을 어떻게 봐야 하는지에 대한 역사 논쟁과 연결되어 있다고 했다. 대한민국 측은 삼국사기,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지리지, 태정관 지령, 대한제국 칙령 41호, SCAPIN 제677호와 같은 역사적 문헌이나 여러 지도들을 인용하여, 독도가 울릉도의 부속도서이며 6세기부터 독도는 대한민국의 고유영토로 확정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고 기술했다.

일본 측은 1905년 독도를 시마네 현에 편입하였다며 대한민국의 주장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일본은 독도 영유권에 관한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회부할 것을 제안하고 있으나 한국은 이를 거부했다. 이미 명백하게 한국땅인 독도를 굳이 재판까지 할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이처럼 두 나라의 관점과 주장을 위키백과는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놓기까지 했다.


한참 전 이명박 대통령이 독도를 방문하자 이와 관련, 독도의 영토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국제사법재판소(ICJ)에 제소하겠다는 일본. 한일 통화 스와프 규모도 축소하겠다는 엄포다. 앞으로 이어질 일본의 전방위적 독도 공격에 5천만이 합심해서 한 목소리로 대처하되 감정적 대응은 자제해야. 시네마현 편입조치가 이미 우리 외교권이 거의 박탈당한 상황에서 이뤄진 국제법적 효력이 없는 사안인 만큼 독도는 대한민국의 영토임이 분명하다고 못 박은 이가 있다. 일찍이 유엔사무총장을 역임한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2005년 "독도는 한일 관계보다 상위 개념"이라고 말했다. 일반인으로는 타임스퀘어 그 비싼 광고판에다 <독도는 우리 땅>이라고 소리 없이 외쳐댄 가수가 있다. 그는 뉴욕타임스에 동해와 독도를 알리는 전면광고를 게재하기도 했다. 그의 갈짓자 기묘한 정치성향은 차치하고 일단 소신만은 뚜렷이 밝히는 김장훈이다, 2012년 런던 올림픽에서 독도 세리머니로 동메달을 박탈당했다가 뒤늦게 되찾은 박종우까지.... 몸으로 소신으로 독도수호 의지를 보여준 그들처럼 그 어떤 손실과 희생이 따르더라도 독도는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 땅이다.



​-광복절에 든 무량화의 이런저런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