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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y 06. 2024

주인과 객

대서양이 나서서 경계 지르기 전까지는 무한정 내달리던 펜실바니아 푸른 평원이다.

그 한 모서리에도 오월이 깊어지면서 짙푸른 수해가 울울이 펼쳐지고 있다.

사방에 넘쳐나는 푸른 아우라, 저마다 힘찬 나무의 정기가 압박하듯 조여드는 느낌마저 든다.

메이플 셰이드란 지명 그대로 단풍나무 그늘 짙은 곳.

도로변을 따라 걷노라면 옆으로 바짝 밀림지대나 되는 것처럼 울창한 잡목 숲이 따른다.

훤칠하니 우람스러운 단풍나무 참나무들이 대부분인데 밑동 언저리에는 온갖 야생초들이 제철을 맞아 한창 탐스럽다.

그악스럽기야 들풀도 마찬가지이지만 얽히고설킨 덩굴식물들은 더부살이 주제에 욕심들이 지나치다.

겨우 자라 오르는 조그만 나무를 온통 뒤덮다시피 점령해 버린 인동초와 찔레덩굴뿐인가.

그중에도 특히 고약스런 무뢰한은 단연 포이즌 아이비다.

미동부에만 서식한다는 포이즌 아이비는 아예 원 나무를 제치고 주인 행세하기 일쑤다.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내치는 격이니 주객전도도 유분수다.

우듬지는 분명 단풍나무 이파리인데 허리춤부터는 세잎 큼직한 포이즌 아이비가 기세 등등이 세력을 넓혀간다.

가장자리에 보풀이 너덜거리는 낡은 로프, 오래되어 썩어가는 동아줄 같은 것이
나무둥치에 밀착된 채로 기어올라 한 몸이듯 엉켜 붙었다.

불량스러운 몰염치범인 포이즌 아이비 덩굴이다.

절로 눈이 흘겨진다.

숲이 끝나는 가장자리에 주로 자리를 잡다 보니 우리와 마찰도 잦다.

얼핏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지독히 가려우면서 벌겋게 성이 나 화농이 되는, 옻나무 류와 흡사한 독초이기 때문이다.

경계할 만큼 모양새 유별나기는커녕 숲에 흔한 그저 그런 잎 셋 달린 보통 덩굴식물일 뿐이다.

길가는 물론이고 집 뒤뜰까지 스스럼없이 침범해 들어오는 이 독초와 닿았다 하면
단번에 물집이 잡히고 진물이 흐르는데 우루시올이라는 특수화학성분 때문이란다.

가렵기로 말하면 잠을 못 이룰 정도라 기어코 병원을 찾게 만든다.

산지사방으로 영역을 넓혀가는 포이즌 아이비 덩굴에 수액을 전부 빨린 어느 단풍나무는 숫제 고사 직전이다.

그도 그럴 것이 꼼짝없이 양분을 다 빼앗기고 마는 약탈자와 한집에 살다 보니 시난고난 맥을 못 출밖에.

숲 여기저기 듬직한 나무줄기마다 한들한들, 양순한 아이비인 양 착 달라붙어 내숭 떠는 식물.

언뜻 일반 아이비와 구분이 안 되나 잎자루에 이파리 셋이 달려있생김새다. 


왕성한 번식력으로 마구잡이 터전을 넓혀가며 천연덕스럽게 주택가까지 마수를 뻗친다.

흡착판이 무수히 달린 기생식물 포이즌 아이비는 아무 데나 음험스럽게 휘감아 오르고 있다.

아마존에 산다는 뱀처럼 시커먼 몸통으로 나무를 타고 오르는 굵직한 덩굴의 포이즌 아이비를 보면 <주홍 글씨>의 칠링워드가 떠오르기도 하고 크메르의 타프롬이 생각나기도 한다.

증오와 질투에 불타 자책감으로 괴로워하는 목사의 숨길을 바짝 조이던 칠링워드다.




타프롬은 캄보디아에 있는 12세기 후반의 유적지로 나무뿌리에 휘감긴 사원이다.

앙코르와트에 있는 타프롬은 고색창연한 유적가치로 보다는 담장과 지붕을 감싼 거대한 열대 수목의 뿌리로 더 기억되는 곳이다.

마악 쏟아져내리며 덮씌우는 용암 줄기와도 같고, 범선을 통째로 휘감았다는 거대한 문어발처럼.


지금도 살아 꿈틀거리며 당장이라도 나를 덮칠 것만 같아 공포스러운 거목 뿌리들.

식물이되 동물적 감각으로 섬뜩하게 압도하는 그 힘 앞에 섰을 때 입이 절로 벌어지며 느꼈던 외경감이라니.

수백 년에 걸친 긴 잠을 깨운 앙리 무어가 처음 그들과 조우했을 당시의 놀랍고도 특별한 기분이 이랬을까.


신들의 정원이라는 앙코르와트 내 타프롬 사원은 폐허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마치 지진이라도 쓸고 지나간 듯이, 집중포화라도 당한 듯이, 대사원은 원형을 찾을 길 없이 마구 허물어진 채 돌무더기만 남겨졌다.

그래도 나무뿌리 틈새로 돌벽에 새겨진 압살라의 풍만한 몸매가 엿보이고 정교하게 귀 맞춘 탑 모서리가 드러난다.

사백 년이란 긴 세월, 사람들로부터 시나브로 잊혀져 있는 동안 다시 정글로 되돌아가 나무에 그 몸을 의탁한 것인가.

사원은 열대 수목을 불러들여 서로가 서로를 끌어안았다.

깊은 포옹으로 그나마 웅장한 석조 문명의 잔해를 지탱해가고 있으니 아이러니이면서도 한편 다행이다.

천천히 자연으로 되돌아가는 타프롬.

폐허처럼 무너져 내린 사원이건만 복구 엄두를 못 내는 까닭은 열대 수목이 이미 석조건물과 완벽한 일체가 되어 분리시킬 경우 오히려 더 심각한 붕괴 우려가 있다고.

이젠 그저 자연의 순리에 맡기는 도리밖에 없는 노릇이다.

하긴 대자연의 입장에서야 우리 모두 너나없이 원시밀림에의 무단 침입자이자 질서를 흩뜨리는 무법자들.

따지고 보면 누가 더하고 덜하다 따질 계제도 아니며 나아가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이라 우겨 댈 것인가.

후세의 호사가들이 이끼 낀 사암이며 흘러내린 나무뿌리에 걸터앉아 역사를 논하지만, 어쩌면 일찍이 크메르인들이 꿈꾼 신들의 정원은 저런 모습이었는 지도 모를 일이다.

그 옛적엔 천지 일월은 물론이고 거목과 거석마다 신격을 부여하고 우러러 숭앙했으니까.

웅장한 탑의 숲, 조각의 숲에서 지금은 괴기스러운 나무의 숲으로 바뀐 채 묵언에 든 타프롬.

거기서 우리는 인간이 이룬 문명의 오만이 자연의 힘 앞에 얼마나 덧없는가를 보게 된다.

세월의 힘, 뿌리의 힘에 강한 충격을 받게도 된다.




자연은 존재하는 모든 것을 결국 흙으로 데려간다는 사실,

우리 역시 예외가 아님을 말없이 거듭 환기시켜 주는데.

존재하는 것 모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이긴 마찬가지 아닌가.

未知生 焉知死(미지생 언지사)라 하였다. 아직 삶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을 알리오.

분명히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냥 맡기고 걸어갈 뿐이다.

단풍나무숲의 밉상인 포이즌 아이비이지만 조물주의 作意가 그러하거늘 구태여 흑백과 주객을 구별해 무엇하리.

뭇 생명은 그분 섭리 안에서 존재하는 것 아니던가.

홀연 자연의 속엣말이 들려온다. 매사 내 기준으로 판단하려 내닫지 말고 섭리에 귀 열라는.    -2007 미주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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