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기월식
어제 날씨는 새벽부터 변화 무궁무진했다.
자다가 뇌성에 이어 촤르륵 쏟아지는 폭우소리에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백로에 비가 오면 풍년 든다 했으므로 농사처 없어도 빈객 납시니 타박할 일은 아니다.
다만 자정 넘어 펼쳐질 개기월식 걸기대 중이라 저으기 신경이 쓰였다.
잦아드는 빗소리에 마음이 놓이면서 다시금 슬몃 잠이 들었다.
남창 가득 눈부신 빛살이 밀고 들어오는 바람에 퍼뜩 눈이 떠졌다.
제주바다에 풍경 현란한 일출이 마악 시작되고 있었다.
지인과 저지에 있는 아마나스 농장으로 붉은 고추를 수확하러 가기로 약조했기에 서둘러 채비를 하고 집을 나섰다.
서귀포 시내에서는 멀쩡하던 하늘이 중문쯤부터 먹구름으로 휘덮혀졌다.
오설록 인근에 이르자 빗발 거칠게 차창을 두드렸다.
영어도시에 들어설 즈음엔 시야 어지러이 와이퍼 바쁘게 움직였다.
오죽하면 잠시 갓길에 서서 폭우 잦아들면 가자고 했을까.
양동이로 쏟아붓듯 뿌옇게 내리던 비가 저지마을 가까워지자 수굿해졌다.
열대성 스콜처럼 느닷없이 국지적으로 퍼붓는 폭우, 그런가 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말짱 개인 푸른 하늘에 흰구름 두둥실 떠있다.
농장에 도착하니 전혀 한 방울의 비도 내린 흔적이 없었다.
후끈 달아오르는 폭염만 기세등등했다.
천변만화(千變萬化)라더니 끝없이 변화하는 기상도요 변덕이 죽 끓듯 하는 일기다.
멀구슬나무에 높직이 자리 잡은 매미, 구월 안에는 짝을 만나야 한다는 염원 담아 맴맴 노래 부르고
새소리 사방에서 여울지는 농장.
해거리를 하는지 지인댁 아마나스는 예년에 비해 열매가 성글게 달렸다.
무성하기론 호박넝쿨, 기운차게 영역을 넓혀가고 있었다.
내 주먹만 한 애기호박 여기저기 널려있고 그새 펑퍼짐 늙은 호박도 둥싯둥싯 익어가는 중.
그 지독스러운 염제의 횡포에도 아랑곳 않고 장한 결실 총총 매단 풋고추는 어느새 빨갛게 물들었다.
지지대에 묶여 일렬종대로 열병식 하는 고춧대야말로 어찌나 건강미 넘쳐나는지 숫제 검푸른 색깔이다.
올해 같은 심한 가뭄에도 용케 목숨 부지한 파초며 양하 이파리 너울거리며 부채질해 주는 덕에 고추 수확하기가 한결 수월했다.
하지만 저지마을회 확성기에서는 폭염주의보 발령 중이니 야외활동이나 밭일 따위 하지 마시란다.
정오되려면 멀었지만 일 접어두고 시장기 핑계 삼아 사계해안 식당가로 달렸다.
깔끔한 단품메뉴가 신뢰감 주는 해녀밥상 톳밥은 이번에도 식도락가 위를 흐뭇하게 채워줬다.
쨍한 태양의 서슬에 쫓기듯 서귀포로 돌아오면서 우리는 의기투합, 밭일로 달궈진 머리 식히자며 소정방폭포로 방향을 돌렸다.
오전에 내린 비로 수량이 풍부해진 소정방폭포 흩날리는 물보라, 서귀포 앞바닷물은 유난히 청청했다.
폭포 물맞이에 재미 들린 지인은 여러 차례 폭포 아래 섰지만 난 며칠새에 찬 기운 느껴지는 물이라 딱 삼세번으로 끝.
오소소 한기 돋아 카페 허니문하우스에 들렀다가 귀가했다.
구름 한 점 없는 창천에 휘영청 둥근달 그러나 약간 붉은 색조를 띤 달님이 어느새 앞바다 남쪽에 떠있었다.
저녁 간단히 때우고 일찌감치 취침 모드, 자정 넘어 한 시에 알람을 맞춰놓고 누웠다.
반영월식 시작: 9월 8일 00:29
부분월식 시작: 01:28
개기월식 시작: 02:31
개기월식 최대: 03:12
개기월식 종료: 03:52
부분월식 종료: 04:56
반영월식 종료: 05:54
알람소리에 깨어 하늘을 올려다보니 달이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서쪽방향으로 젖히고 두리번거리며 달을
찾았다.
방위가 동남향인 집이라 실내에선 어렵겠다 싶어 겉옷을 걸치고 밖으로 나갔다.
서녘 하늘가로 흘러가는 달이 그제사 보였으나 상가 조명이 하도 밝아 올레시장 길가 공영주차장 삼층으로 올라갔다.
길고양이 어슬렁거리는 야심한 시각, 텅 빈 공영주차장 꼭대기에서 목 뒤로 젖히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1인.
할망이니 망정이지 젊은 여성이라면 거의 모험에 준하는 이런 행동을 섣불리 하겠나.
새벽 한 시 반 즈음, 월식 현상이 서서히 잡히기 시작했다.
갓 시작된 부분월식 상태라, 육안으로도 달의 상부 왼편짬이 그을린 듯 보였다.
폰사진으로 담기에는 그러나 영 미진했다.
맨눈으로만 월식놀이를 즐기기로 하고 한 시간 가까이 머물다가 본격적으로 개기월식에 들어갈 때 거처로 돌아왔다.
오래전 미국집 뜨락에서 월식을 볼 적에도 달이 어둠에 먹히는 양상은 퍽 으스스했었다.
더구나 영화 '돌로레스 클레이본'이 떠오르면서 오싹 소름이 돋았다.
월식만 바라고 밤을 새우며 하릴없이 손 맺고 하늘만 올려다보느니 일감이라도 손에 들기로 했다.
마침 낮에 따온 붉은 고추와 고춧잎 다듬어 씻으며 시간 적절히 활용하다 보니 시간이 잘도 흘렀다.
밤 세시 반 경, 서쪽으로 많이 기울어진 달일 터라 한라산이 마주 보이는 복도 창을 열자 어느새
달 형태는 그믐달 모양이 된 채 불그죽죽하게 보였다.
개기월식이 종료되는 네시 경, 먹물빛 구름이 하늘을 가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십분 후, 다시 복도로 나가보니 삼매봉 아래쪽 도시 불빛만 보일뿐 음산한 하늘은 불온하기 짝이 없었다.
새카만 하늘은 먹장구름이 사방에서 몰려들어 그리도 까맣게 보였던 듯.
순간 우르릉 쾅! 뇌성이 들리더니 섬광 번쩍거렸다.
얼른 현관문을 닫고 안에 들어서자마자 빗줄기가 앞 창문을 난타해 댔다.
네시 반 무렵부터 우레소리 연달아 귀청을 때렸고 번쩍! 하면서 번개 무섭게 쳐댔다.
아침에 영어도시 지나며 만났던 폭우가 또다시 내습해
서귀포 기상도는 변화난측(變化難測) 그 자체.
따라붙듯 쏟아지는 장대비, 바다 건너 어디선가 몰려오는 뇌성벽력은 가히 공포 수준이었다.
동영상을 담다가 바로 가까이서 벼락 치듯 콰당탕 거리며 눈앞 하얗게 섬광 번지자 엄마야! 폰 내던지고 차렵이불 덮어썼다.
그 하루야말로 변화무쌍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