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신한 향이 흐르는 오월 신록을 따라가 보면 영락없이 찔레꽃 덤불이 하얗게 흐드러졌다. 그리움처럼 스며드는 찔레꽃 향기가 슬그머니 나를 이끌어 오래전 기억 속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한다. 해마다 찔레꽃 앞에 서면 저절로 떠오르는 하얀 얼굴 하나.
초등학교 오 학년 적 일이다. 담임을 맡은 김오희 선생님은 보얀 얼굴에 까만 벨벳 치마와 더불어 찔레꽃 향기로 기억되는 분이다. 첩실에 빠져 두 집 살림을 하던 아버지로 인해 그늘이 져버린 아이. 여리여리 어린 내가 안쓰러워서였던가. 편애에 가깝게 살가운 눈길로 보듬으며 내게 특별한 사랑을 베풀어주셨다.
교실 환경미화를 준비할 때는 물론이고 숫기 없는 나를 학예회 연극의 주인공으로 앞세우기도 했다. 학교 근처 선생님의 자취방에서 함께 무대옷을 만들거나 연극대사를 따라 외우다가 잠이 들 적마다 이불깃에서 기분 좋은 향이 스며들었다. 그건 은은히 밴 로션 냄새이거나 분내일 터였다. 찔레꽃 향기 같은 청신한 내음을 간직했던 우리들의 처녀 선생님.
여름방학이 끝나자마자 이상한 풍문이 돌며 교실 안이 뒤숭숭해졌다. 학기 초도 아닌데 느닷없이 담임선생님이 바뀐다는 소문에 아이들은 술렁대기 시작했다. 풍문은 사실이었다. 중앙통에 자리한 오직 하나뿐인 약국집 딸이 근무하던 벽지학교로 우리 선생님이 전근되며 교사끼리 서로 자리바꿈을 한다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충격적인 소문에 휩싸여 불안하기만 했던 우리 반 아이들은 결국 작별의 그날을 맞았다.
지역 유지로 떵떵거렸던 약국집의 입김이 교사 인사발령에 작용하던 어수룩한 세월이었다. 그런 류의 부조리가 요새야 언감생심이겠지만, 전후 모든 게 제자리를 잡지 못하던 50년대만 해도 세상이 그리 허술하고도 어리숙했다. 술렁임이 출렁임으로 바뀌며 반 아이들은 훌쩍대기 시작했다. 선생님이 떠나시던 날, 모두가 울고 불며 치맛자락을 놓지 않아 돌아선 선생님의 눈시울을 그예 젖게 만들고 말았다.
우리는 학기 도중에 어거지로 새 담임을 맞게 되었다. 교실 분위기는 서먹하기만 했다. 우리와 김 선생님 사이를 갈라놓으며 끼어든 혹은 새치기를 한 새 담임은 어린 마음에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거부할 수 없는 현실에 우린 입을 삐죽거리며 한 선생을 미워만 했다. 새엄마와의 관계가 그러할까, 번쩍대는 양단으로 치장을 한 새 담인인 한영자 선생님과는 끝내 정 붙이지 못하고 뜨악한 채로 5학년을 마쳐야 했다.
지난해, 내용은 달라도 유사한 성격을 띤 문제가 한 단체에서 발생하며 결국 공동체의 분열을 초래했다. 한국에서 파견한 전임자였던 선배와 다시 발령받은 후임자까지 온갖 술수를 동원해 기어코 밀어냈다. 현지 사목회장을 앞장세워 몇년째 암암리에 공작을 벌여온 결과였다. 서슴없이 끼어들기를 한 그는 자기 잘못을 최소한이나마 인정하기는커녕 여전히 당위성만을 되뇌었다.
제자리나 순서가 아닌데 무리하게 끼어들면 그건 룰을 어기는 일, 곧 반칙이 된다. 그렇듯 끼어들기는 비겁한 행위다. 새치기는 부끄러운 짓이다. cut in, muscle in, break in, intervene 등 저마다 뉘앙스 자체가 긍정적인 의미는 아니다. 오지랖이나 간섭 및 참견을 넘어 적극적인 개입이므로.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공히, 사회 질서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정당한 방법으로 찾아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도록 가르쳤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사 가운데 끼어듦으로 인해 질서가 흩트려지거나 새치기로 혼란이 일어나는 여러 경우들. 차례대로 줄을 선 곳에 끼어들어 새치기하는 얌체 행위는 당연히 눈총감이다. 얘기 도중에 불쑥 끼어들면 밉상되기 십상이며 옆 차선에 함부로 비집고 들어가다가는 크고 작은 접촉사고를 낸다. 특히 한국에서 다반사로 나타나는 사회지도층의 반칙은 이해당사자뿐 아니라 국민적 강한 저항을 받게 된다.
부부 사이, 친구 사이, 나아가 국가 간에는 신뢰감이 가장 중요함은 재론할 여지가 없다. 둘째로 신경 쓸 일은 밀착관계를 금 가게 만드는 끼어듦이다. 부부나 친구나 국가 사이에 발생하는 불화의 대부분은 무언가가 끼어들며 비롯되었음을 증명하는 사례는 도처에 널려있다. 우리 교회 공동체의 분열만이 아니다. 아직도 이름이 잊혀지지 않는 옛 담임 선생님이 눈물바람으로 우리 곁을 아쉽게 떠날 수밖에 없었던 것처럼.
해마다 오월이 오면 찔레꽃은 거듭거듭 핀다. 찔레꽃 향기 속에서 잠시 뒤돌아 그날을 회억 하는 까닭은 그 아쉬움이 여전 현재진행형이기 때문이리라.
2009/ 미주중앙일보
사진 : 픽사베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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