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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무량화 Mar 10. 2024

베이비 박스와 배넷


언젠가 캐나다 앨버타주의 가톨릭계 병원에 아기 바구니가 등장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천사의 요람'이란 이름의 이 바구니에는 원치 않는 신생아를 비밀리에 두고 가도록 해두었다. 바구니에 아기가 놓이면 1분 후에 병원 안의 간호사실로 신호가 온다는 것. 그러나 캐나다 각 주에선 2~3년에 한 건의 영아 유기가 발생한다는 마무리 멘트에 역시나! 했었다.


아주 오래전, 사십 하고도 수년 전의 기억이다. 강보에 싸 안긴 갓난아기가 자면서 웃거나 입을 오물거리는 짓을 하면 배냇짓하는구나, 했던 생각이 난다. 배냇저고리는 아기가 모태를 벗어나 세상에 나와서 처음 입는 저고리를 이르는 말이다. 배냇저고리의 '배냇'은 배의 안쪽(內)이라는 뜻이다. 배냇저고리를 형상화한 로고가 상징하듯 이 모임의 성격은 친부모를 찾으려는 해외 입양인들 돕는 일을 해나가고 있다. 물론 서울과 미국, 유럽을 잇는 네트워크도 활발히 가동 중이다.



첫 번째 <배냇> 모임 날,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니.... 회원들이 치즈케이크이며 따끈한 팥 시루떡을 해오는 등, 뜻을 같이한 젊은 엄마들은 입양인 돕는 일에 한결같이 적극적이었다. 시작은, 샌프란에서 파견근무를 마치고 귀국한 조카가 미국 친구의 부탁에 기꺼이 앞장서면서부터다. 미국에서 자녀들 학부모로 친하게 지낼 적엔 전혀 내색하지 않았기에 몰랐던 출생의 비밀을 갖고 있는 친구. 의사인 그녀는 한국 태생의 입양아였고 스스로의 존재에 대한 자아정체감의 혼란을 정리해두고 싶어 했다. 어릴 적 기록을 동봉한 친구의 메일을 받은 조카는 한국에서의 마지막 족적이 남은 고아원이 있는 대구로 내려갔다. 몇 차례 서울에서 대구를 오간 끝에 어렵사리 그녀의 흔적을 더듬어 퍼즐을 맞출 수가 있었다.



그 와중, 친구 엄마가 정신적 결함으로 부랑아 시설에 수용됐다가 사망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조카는 망연자실 탈진 상태에 이르기까지 했다, 친구에게 어디까지 진실을 전달해 줘야 될지가 고민되었기 때문. 서양 문화권에서 자란 친구인 데다 의사여서 그런지 지극히 이성적인 그녀의 청에 따라 결국 모든 걸 솔직하게 알려주었다. 휴가를 낸 친구는 자기 온 가족과 함께 한국을 방문해 생모의 족적을 찾아보고 나서 큰 숙제를 마친 기분이라고 했다던가. 그 일로 매스컴을 타기도 했지만 어쨌든 그 후 복지 기관을 통해 부모를 찾다가 벽에 부딪힌 입양인들의 도움 요청이 늘어나면서 조카는 입양 문제에 깊이 관여하게 되었다. 미국 쪽은 그 친구가 주축이 된 입양인 커뮤니티와 접속하여 부모 찾기 일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와 맞닥뜨리면 오랫동안 잘못 운영된 국가정책을 성토하며 분개한다. 고아를 마구잡이로 외국에 수출해 버린 나라이자 후속 조치나 사후관리가 전혀 되지 않았다는 점이 못마땅한 것. 가난은 나라님도 구제할 수 없다 하였다. 그러나 육이오 전쟁통도 아닌 7~80년대에도 고아가 다수 생겨났다는 건 나로서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한편으론 당시 사회상을 대변하는 지표와도 같은 셈이라 씁쓸키도 했었다.


세계대전과 한국전쟁 월남전 등 대규모로 전쟁고아가 발생한 뒤 이뤄지는 불가피한 상황 하의 국제입양을 여기서 거론하려는 게 아니라. 이미 하계/동계 올림픽까지 치른 한국이 아닌가. 그럼에도 해외입양은 6·25 전쟁 직후가 아닌 70년대부터 본격화되어 80년대 최고조에 달했다. 하여 1985년도에는 입양아 수가 8837명이나 됐다는 통계자료도 있으니, 그렇다면 거의 하루에 24명꼴이 된다. 당시 정식 루트 외, 돈에 눈먼 사이비 브로커의 농간도 있었겠고 암암리에 부조리한 편법을 쓰는 시설도 영 없지는 않았으리라.



그렇듯 더러는 어려서 길을 잃는 바람에 애가 탄 부모들이 울며불며 찾아다니는 경황 중에 이미 보호시설에 있다가 입양된 케이스도 있었다. 또는 이혼가정에서 양쪽 모두 자녀를 원치 않을 경우, 조부모 집이나 고아원에 맡겨졌다가 입양되기도 하였다. 그보다는 급속한 산업화로 세상이 빠르게 변해가며 동시에 성 개념마저 희박해지면서 미혼모가 늘어났던 점을 간과할 수 없겠다. 육아에 필요한 안정적 수입원도 없으면서 대책 없는 임신에 따른 불가피한 선택은 아기 출산 후 포기였다. 그렇게 버려져 피부색이 다른 양부모에게 입양된 아이는 어딘지 어색한 자신에 대한 궁금증을 안고 평생을 살아가게 된다. 자신의 존재감이 모호하고 석연찮을수록 스스로의 뿌리, 역사를 알고 싶은 욕구가 필연적으로 생길 수밖에 없을 터다.



아직도 국내 입양만으로 고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는 한국이다. 핏줄을 중시하는 한국인의 정서상 입양 자체를 꺼리기 때문이다. 근본 모르는 아이를 선뜻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생각이 국내 입양 길을 막는다. 해서 1953년부터 오랜 기간 동안, 한국은 고아 수출국이란 오명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실제로 미국 입양아 셋 중 하나는 한국아이였다니까.


이 같은 대규모 해외입양 결과 여러 부작용이 노출되기 시작했다. 사회적으로 크게 성공한 입양인 사례도 많지만 다수의 입양인이 나이 들어갈수록 정체성 혼란, 인종적 소외, 우울증 등 고통을 안고 그늘진 삶을 살고 있었다. 그나마 수십 년 전에 해외입양된 이들은 지구촌 곳곳에서 커뮤니티를 만들어 연대, 소통하고 있으나 근자 들어 입양인 숫자가 줄어들며 더욱 외로운 처지로 내몰리는 현실. 더욱이 파양이 되면서 강제 추방된 입양인이 한국에서조차 적응을 못하고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예까지 있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또 한 가지, 이 일을 하다 보면 입양아 기록이 일원화되지 않아 들쑥날쑥인데다 보관상태도 허술해 자료 찾기에 애를 먹으며, 비협조적인 시설장 태도에 부아가 치밀기도 한다. 해서 부모 찾기에 직접 나선 입양인들은 복지회를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입양 과정에서부터 모종의 커넥션이 있었다고 의심하며 고아를 팔아먹은 나라라면서 정부를 힐난하게도 된다.


매사 원칙론대로만 재단하며 사시를 뜨고 세상을 지켜보는 젊은이들은 자연 이 문제 역시 오해를 옴팡하게 되어있다. 그 과녁은 홀트 집안에 맞춰져 줄곧 의혹의 눈초리로 바라보면서 입양 장사로 치부, 홀트복지타운까지 세운 거 아니냐는 둥 얼굴 붉혀가며 열을 내기도 한다. 그런 젊은이들의 고정관념 내지 편견이 깨어지는 계기는 우연히 왔다. 몇몇 엉터리 기사를 보고 사실 여부 확인도 안 된 채 근거 없이 떠도는 낭설에 분기탱천했는데, 얼마 전 홀트회에서 입양된 이와 동행하여 홀트복지재단 본부를 찾을 일이 생기게 됐다.



한국의 대표적 해외입양기관인 홀트아동복지회의 설립자 해리 홀트 씨는 신실한 근본주의 기독교인이었다. 부모와 함께 1955년부터 복지회를 이끌어 온 외동딸인 팔십 중반 노인을 만나본 결론인즉, 홀트회에 대한 부정적 선입견이 대폭 바뀌게 되었다. 동방 사회복지원 등 다른 체제는 어떤지 모르겠으나, 말리 홀트 여사의 투박지고 거친 손을 맞잡은 뒤 비로소 진정이 헤아려졌던 것.


코에 산소마스크를 끼고 그녀가 일하는 집무실은 치장 없이 간결 소박했으며, 낡고 오래돼 나달거리는 의자처럼 그녀는 주름살 깊은 얼굴의 보통 할머니일 뿐이었다. 내심 은근히 드라마에 나오는 상류층의 고고한 노부인을 염두에 두었다면 단방에 부끄러워 고개 숙여질 일. 그랬다, 순수한 눈빛을 가진 질박하고 검소한 그녀. 미혼으로 홀로 사는 그녀에게 세속적 욕심이 있다 한들 재물을 무엇에 쓸 것인가. 부모에 이어 딸까지 재화를 하늘에 쌓아 온 그 얘기를 나누며, 세상은 아직 살만한 곳이라는데 우리 모두는 동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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