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깊어가는 뉴저지의 어느 가을날. 도로 양쪽으로 바다처럼 질펀하게 펼쳐진 농장지대를 지난다. 쨍쨍한 양광 아래 한 밭자리의 콩이 눗누렇게 익어가며 더러는 톡톡 알갱이를 튀기는 중이다. 갈바람에 서걱대는 빈 옥수숫대는 사일로에 들어갈 때를 기다리며 머쓱하니 서있다. 그러고 보니 무청을 말리기 좋은 철이고 고춧잎을 훑을 시기이면서 고구마도 제철을 맞았겠다. 고구마를 캔 다음 고랑 따라다니며 그 줄기를 따서 삶아두면 대보름 나물로 제격이었다. 아마도 이즈음 한국에서는 벼베기가 한창일 것이다. 지금은 봄에 씨 뿌려 가꾼 것들을 거두어들이는 수확의 계절이다.
아주 오래전 한 텔레비전 채널의 어린이 퀴즈프로 시간이 생각난다. 지금 다시 떠올려봐도 싱그레 웃음 머금어지게 하는 그 장면. 눈빛 또랑한 섬 소년이 또래 다른 학생 다섯 명과 함께 출연을 했다. 출제자가 문제를 읽는 긴장된 순간, 잠시 후 짧은 설명만으로도 금방 알았다는 듯이 소년은 급하게 벨을 누른다. 고매! 그 소년은 고매라고 거듭 소리쳤다. 답을 알긴 아는데 표준어가 아니니 진행자가 얼른 손사래를 치며 안타깝다는 듯 한번 더 기회를 준다. 아니 세 글자로 다시.. 그러자 소년은 이번엔 물고매!라고 크게 외친다. 터지는 방청석의 박장대소. 눈물이 나도록 웃은 기억이 나는, 실제 생방송 중에 있었던 일이다. 다들 뒤로 넘어가게 만든 고매는 고구마의 경남지방 사투리였다.
요즘 들어 줄창 고구마로 아침 요기를 때운다. 거기에 우유 한 잔이면 족하다. 원래 식대로라면 빡빡하게 메이는 목을 달래 줄 동치미나 배추김치가 따라줘야겠지만 미국인 속에서 사니 냄새 때문에 아침에는 저어 된다. 논어에 나오듯 나물 먹고 물 마시고 팔베개하고 누워 자족하는 경지는 물론 아니나 예전부터 나는 촌사람답게 고구마를 꽤나 즐겼다. 오죽하면 고구마를 처음 들여온 조선시대 조엄이란 어르신을 고마이 여겼을까. 그만큼 좋아하는 고구마이면서 고구마를 활용한 여러 요리법, 이를테면 군고구마나 고구마 맛탕 튀김 등속보다는 그냥 손쉽게 찐 고구마만을 내 기호는 고집스레 선호한다. 그럼에도, 즉 고구마를 먹으면 살이 찐다는 속설과는 달리 살은커녕 비쩍 말라 불쌍한 동포로 보일 지경이니 그 점 희한한 노릇이다.
한때 구황(救荒) 작물로 이용되던 고구마이나 지금은 건강식품으로 대접받고 있는 고구마다. 근자 들어서는 고구마 식이요법에 관한 책까지 등장해 고구마 열풍이 불고 있다. 주린 배를 채워주던 고구마가 웰빙시대에 주목받게 된 이유는 그 성분으로 인해서란다. 항산화 물질인 베타카로틴이며 비타민 C에다 칼슘과 인이 풍부히 들어있는 알칼리 식품으로 섬유질 풍부하므로. 미국공익과학센터에서는 '최고의 음식 10' 첫 순위에 올려놓은 고구마다. 일본 도쿄대 의과학연구소에 따르면 고구마의 발암 억제율은 최대 98.7%로 가지, 당근, 셀러리 등 항암효과가 있는 채소중 첫째로 쳤다. 끈적한 하얀 유액인 알라핀이라는 성분은 장 안을 청소하는 기능이 있어 대장암을 예방하는 효과도 있다. 게다가 고구마에 함유된 식이섬유는 다른 식품의 식이섬유보다 훨씬 흡착력이 강하다고 한다. 각종 발암물질과 담즙 노폐물, 콜레스테롤, 지방까지 흡착해서 체외로 배출시키는 효능을 보인다고 하였다.
그런 이론적 가치 이전부터 그냥 내 식성에 맞아 어릴 적부터 좋아한 고구마다. 미국에 오니 고구마 맛이 나면서 속살이 당근처럼 붉은 얌이라는 게 있는데 그건 물컹하니 당도도 낮고 맛도 별로다. 그럼에도 잎 생김새며 땅속줄기라는 것까지 둘은 서로 닮았다. 처음엔 여러 차례 얌을 고구마인 줄로 착각하고 속아 사기도 했다. 내가 하대하는 그 얌도 댕스기빙데이 상차림에는 중요한 한몫을 차지한다. 아무튼 마과에 속하는 뿌리채소로 추수감사절에는 빼놓지 않고 올려지는 얌이다. 하긴 고구마 원산지가 중앙아메리카이니 어쩌면 아메리카 인디언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리라. 얼핏 보기에 겉모양이 고구마와 비슷해 헷갈리기도 하나 이젠 그 구분을 제대로 해 혼동하는 일은 거의 없어졌다. 천상 촌사랍답게 이날은 황토땅에서 캐낸 붉은 껍질의 토종(?) 고구마를 사러 한인마켓에 들렀다.
교우 중에 손맛이 유독 탁월한 노인 한분이 계시다. 친정이 남도인 그분의 전라도 식 반찬 솜씨는 정말이지 기가 막힌다. 그 댁에서 어제저녁, 동치미가 아주 마침맞게 맛들었다며 한통을 갖다주셨다. 뒤란에 내놓았다가 오늘 아침 뚜껑을 여니 살얼음이 살푼 언 듯 너무나 맛깔스레 보여 절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속이 노오란 배추는 얌전하게 섶을 갈무려 실로 동여매져 있다. 참하고 미끈하게 생긴 이쁜 무에다 새파란 쪽파. 반으로 갈라 속을 파낸 배며 알맞게 채를 친 생강 마늘 밤까지.. 흐미~~ 국물을 떠먹어보니 싸아~ 시원하고도 짭조름한 맛이 일품, 거의 환상적이다. 유년의 겨울철, 땅에 묻어둔 독에서 갓 꺼내 상에 올려진 바로 그 맛! 거의 눈물이 핑 돌 정도로 감동 먹으며 동치미 개운한 향을 한참토록 음미했다. 투명한 유리그릇에 담긴 동치미가 향수의 미각을 자극한다. 이에 찰떡궁합은 역시 고구마. 뭐니 뭐니 해도 따끈하게 찐 고구마가 제격으로 딱 어울린다. 겨우내 아침식사 대용으로도 그만인 고구마다. 고구마의 효능은 다들 잘 아는 바, 웰빙식품으로 한창 뜨는 요즘 아닌가. 바야흐로 겨울철이다. 고구마와 동치미가 있어 촌사람은 그저 행복하다.
발그레 먹음직스러운 고구마를 사고 나서 채소전을 둘러보니 시퍼런 무청을 단 동치미 무가 나왔다. 무는 세일 중이다. 무청만 사도 그 가격대는 줘야 할 텐데 무 뿌리까지 딸려오니 웬 횡재람. 주저없이 한 보따리를 샀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동치미를 한 단지 담았다. 무를 다듬으며 잘라둔 무청은 가지런히 담에 걸쳐 놓고 말렸다. 가을 날씨는 더없이 화창하니 날마다 햇살 눈부셨다. 따스한 가을볕 아래 무청은 바야흐로 지금 시래기로 알맞게 익어가는 중이다. 요즈음 햇볕이 하도 좋아 걸핏하면 냉장고에 든 버섯이며 하다못해 생강까지도 채를 썰어 말려두었다 마켓이 멀어 급할 때 요긴하게 쓰는 나로서야 당연했다. 동치미가 익으면 앞으론 저녁 간식으로 고구마 먹으며 우유컵은 치우리라.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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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마다 가을이면 연례행사로 시래기를 말린다. 농장에 가서 무청을 사다가 펜스에 주욱 걸쳐놓으면 가을 양광에 바스러지게 잘 마른다. 잘 거두어 박스에 착착 챙겨두었다가 시시때때로 삶아서 요긴하게 쓴다. 전체친교를 할 적마다 계절 관계없이 우리집 메뉴는 겉절이에 시락국. 된장 풀고 멸치 몇 마리, 거기에 땡초 쫑쫑 썰어 넣어 국을 끓이면 다들 오랜만에 맛보는 고향맛이라고 얼마나 훈훈해하는지....
#천상 촌사람이다. 아무리 미국에 살아도 태생 촌사람 식성이 어디가랴. 끼니마다 밥에 김치에 된장찌개 없이는 어쩐지 밥 먹은 것 같지가 않다.
스파게티보단 차라리 비빔국수가 입맛에 맞고 피자보단 오히려 부침개가 훨 낫다. 시리얼을 먹을 바엔 우유에 미숫가루를 타서 훌훌 마신다. 콜라? 아마도 여러 해 미국 살며 총량 한 컵이나 마셨을랑가? 커피는 사십 년 전부터 아예 입에도 안 댄다. 반면 고구마는 칠십 년 전이나 똑 같이 여전히 즐긴다.
#한국에 와보니 고구마가 금고구마가 됐다. 전에 비하면 가격이 비싸도 너무 비싸다. 구황작물이 어쩌다 이리 귀하신 몸이 됐을까. 그냥 버려지던 고구마줄기도 건강식품으로 뜨면서 귀한 대접을 받는다. 농가에서는 뿌리보다 줄기가 더 값나간다고 일부러 줄기 무성해지도록 가꾼다고도 한다. 시절을 잘 타고나 한껏 빛을 발하는 고구마 가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