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라산 산지에 간밤 폭설주의보가 발령됐었다.
오늘 아침 백록담은 구름에 싸여있었으나 한라산 자락이 새하얬다.
서귀포 시내는 맑은 날씨였다.
눈이 녹기 전 천백고지로 달려갔다.
위호텔 인근까지만 해도 멀쩡하던 도로변.
거린사슴전망대 무렵부터 길가에 눈이 희끗거렸다.
서귀포휴양림을 지나 영실 입구에 이르자 눈이 길가에 제법 쌓여있었다.
다음번 정거장이 천백고지 휴게실이다.
긴가민가, 과연 거기 가면 눈꽃을 만날 수 있을까?
현재 상태로는 겨우 길섶에 깔려있을 뿐인 눈이다.
천백고지 어름에 이르자 나무마다 아른아른, 시폰 드리워진 듯 주위가 보얗게 보였다.
불과 몇 분만에 신기하게 변신한 숲, 놀랍다.
야트막한 언덕 넘어가 바로 천백고지다.
차량이 아랫길가까지 주차돼 있다
경찰차 경광등이 번쩍대고 사람들 소리.
그야말로 느닷없이 설국이 펼쳐졌다.
어리둥절할 정도로 갑자기 열린 신천지.
풍성한 적설량이 아니라서, 푸른 하늘이 받쳐주지 않아서, 전년도 같이 눈부신 눈꽃세상은 아니지만 이쯤으로도 감탄! 감동! 감사! 감읍!
천백고지 주차장은 차량과 인파로 북적거렸다.
예년 눈꽃경관이 피크일 때는 소형차량 진입을 통제했는데 아직 그 수준은 아니라서 열려있는 도롯가 양쪽으로 오가는 차량들 엉켜있었다.
눈길 사정이 괜찮아 준비해 온 아이젠을 장착할 필요는 없었다.
장갑도 거추장스러워 가방에 넣어두었다.
우리는 설경 누비며 올 들어 첫 설화를 사진에 담기 시작했다.
천백도로 입구 정거장에서 기다리는 중에, 법환에서 온 자매와 우연히 이야기를 나누게 됐다.
그들은 서귀포자연휴양림에 가려고 나왔다 했다.
관광지 제주에 관해 집에서 나서기 전 미리 검색을 하지 않아 거의 정보가 없는 그들.
한라산에 눈도 쌓였으니 올라가는 김에 먼저 천백고지 들렀다가 내려가면서 휴양림 가는 게 좋겠다고 했다.
둘이 잠시 의논하더니 자기들도 그래야겠단다.
평상시 거의 손님이 없는 편인 240번인데 컨벤션센터에서부터 좌석이 반 남짓 차 있었다.
우리 외에도 기다리는 승객이 많아 금세 버스는 만원이 됐다.
간밤 눈소식에 고무돼 천백고지 설화가 하마 피었을까 궁금한 이들이 의외로 많았던가 보다.
회수 삼거리에서 본격 산행 차림을 한 두 커플이 올라탔다.
한라산 자락 초입, 중산간도로를 건너자마자 눈길 통제를 하던 경찰차는 보이지 않았다.
아침 여섯 시 반에 온 안전문자만 해도 대설로 인해 천백도로에 소형차량 운행은 통제된다고 했는데?
그동안 제설작업을 했는지 소형차들도 산길 신나게 오르내렸다.
위호텔을 지나고 법정사 입구에 이르도록 암튼 희끗한 눈 흔적도 없었다.
버스가 S자 도로를 빙빙 돌면서 한라산 자락을 올라가는 동안 길가엔 마른 낙엽만 뒹굴었다.
거린사슴전망대 커브길을 돌 무렵에사 백설 자취가 약간 눈에 들어왔다.
그래도 슬슬 부담이 됐다.
천백고지에 서리꽃이든 눈꽃이든 새하얀 설화는 아니라도 무언가 변화가 생겼을까, 과연?
서귀포 휴양림까지도 눈이 쌓인 상태는 아니었고 약간 깔린 정도였다.
자매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내처 앉아있었다.
영실 입구를 스치고 영실 지소를 지나서 다시 한라산으로 꾸역꾸역 기어올라가는 버스.
언뜻언뜻 보이는 한라산은 보얗게 분단장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필시 눈을 덮어쓰고 있는 모습이지만 천백고지는 가까워오는데 인근 숲은 마냥 맹송한 얼굴이다.
내심 신경이 쓰였다.
공연히 나서서 아는척했네, 자연휴양림 숲길이나 걷게 내버려 둘 것을... 입방정 떤 스스로를 탓했다.
딴에는 좋은 정보는 나눠야 된다고 생각했는데 괜스레 시간만 축내고 헛걸음하게 한 건 아닌지.
혼자 속을 끓이며 자책을 했다.
그러게 타인의 일에 참견은 금물이야, 괜한 오지랖 떨지 말라니까.
남이사 뭘 하던 상관 말 것이며 선 넘는 친절은 도리어 해를 끼치는 행위라니까.
오만 생각이 들며 마음이 복잡해질 즈음 짜잔! 백설의 동화가 눈앞에 신비로이 전개됐다.
우리는 뜻밖의 환대에 감격하며 우르르 차에서 쏟아져 나왔다.
선생님, 이렇게 좋은 곳 알려줘서 고마워요~!
진심으로 우러나서 하는 말이었다.
그녀들의 얼굴이 환해지는 걸 보자 잠깐동안의 내적갈등 상황 깨끗이 종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