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백고지에서 백산호초와 놀다

천백고지는 오늘도 눈꽃 잔치

by 무량화


대기 투명한 아침, 점점 더 하늘은 푸른빛 눈부셨다.
나일블루 혹은 피콕블루에 가까운 짙은 파란색 하늘.

바다색도 유난히 푸르다.

얼른 현관을 열고 한라산을 건너다보았다.

한라산 역시 청명한 하늘 아래 구름 띠 머플러처럼 둘러 백록담은 보이지 않았다.

신비감을 더하려 구름으로 영봉을 감싸는지 특이한 현상을 아주 잦게 보여주는 한라산.

차가운 북서풍이 반도를 따라 흘러내리다가 제주에 이르러 따뜻한 수온을 만나면 기온 차이로 구름층이 생긴다는데.

높은 고도의 산악지대에서는 상승기류로 인해 눈구름이 형성되는 바, 한라산에서는 특히 더 폭발적으로 발달한다나.

겨우내 거의 날마다 한라산 언저리에는 구름층 두터이 감돌아 정상 보기가 쉽잖다.

그 구름층 덕에 밤새 눈 위에 다시 덧보태지곤 하는 눈발.

오늘 마침 새파란 하늘 배경이라 눈꽃 얼마나 눈부시겠나.

토요일 천백고지 비경을 잊었냐며 은근 손짓해 대는 영산.

쾌청한 일기에 행여 눈 녹을세라 마음이 급해졌다.

운해에 잠겨있지만 살푼 드러난 영실 쪽 하얀 산기슭 유혹에 금세 행장 꾸린다.

털모자에 털코트, 아이젠을 챙기자 후다닥 마음이 먼저 내닫는다.



어제 오를 때는 법장사 부근 고도부터 설경 어우러졌었다.

이번엔 서귀포자연휴양림 즈음에서야 눈밭이 보였다.

풍성하던 눈꽃 햇살에 녹아 다소 성글어지긴 했지만.

봄날씨 같이 다사로운 아랫녘 서귀포 도로변에는 동백 방실거렸으며 유채꽃 핀 데도 있는데 천백도로 곳곳은 여전 눈길이다.

나무마다 새하얗게 감쌌던 눈 그새 녹아 스러졌지 싶었는데 영실 입구부터 여전스레 펼쳐진 하얀 설경.

초입 약간 지나자 갓길에 세워둔 승용차들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영실 매표소 진입로는 1킬로 전방부터 이처럼 길게 차들로 갓길이 메워져 있다.

날씨 쾌청한 휴일이라 윗세오름 설원 등반객이 불어날 만도 했다.

오늘 윗세 오름 등산로 미어터지고도 남겠다.

영실 매표소 정류장에 눈꽃버스를 기다리는 승객들 줄이 구불텅 길었다.

만석 이룬 버스는 천백고지에 이르자 한 코스만에 절반 이상 승객을 부려놓고 다시 꾸역꾸역 새 손님들을 태웠다.

주말 설경으로 안내하는 한철 눈꽃버스 인기는 가히 초절정.

천백고지에 눈이 쌓이면서부터 240번 노선버스의 경우도, 옛날 명절 전날 귀향버스만큼이나 복잡하다.



이번 역시 영실은 그냥 패스한 채, 보다 적설량이 많은 천백고지에서 차를 내렸다.

그야말로 발 푹푹 빠지는 미답의 설원.

눈밭에서 조금만 숲으로 들어가도 이처럼 눈 덮인 숲길 고요하니 그윽하다.

설경 속 숲길 명상이라도 해봄직하나 눈만 보면 흥분부터 되는지라, 눈밭 이리저리 노루처럼 헤매며 철없는 아이 되어 마냥 누빈다.

발자국 뗄 적마다 행여나 미끄러질까 긴장했는데 아이젠 장착하니 빙판길도 척척 걸을 수 있어 좋았다.
발열조끼를 입어 등판 따땃해서인지 눈바람도 과히 차갑지 않아 흐흠~ 괜찮군! 소리가 절로 나왔다.

정자 높직한 휴게소 쪽은 구름장 떼로 몰려가느라 설화 윤곽선조차 애매해졌다.

일단 하늘 푸르른 때를 놓치지 않으려 데크로 들어섰다.

오늘도 습지 데크길은 반만 열렸다.

데크에 쌓인 눈 말끔히 빗질돼 편안하게 걸어가며 주변 습지와 둘러선 설산 풍치 음미하는 시간이다.

한라 영봉이 거느린 오름 아래 숲은 은세계.

구름의 변화무쌍한 조화로 거의 한자리에 서서도 다채로운 만화경을 즐기는 기분이다.

같은 눈꽃이라도 배경색에 따라 얼마나 느낌 달라지는지.

겨울동화를 줄줄 써내리는 숲과 달리 빙판 아래 습지는 마냥 적막하다.

까마귀 소리만 하얀 적요에 까만색 방점을 찍고 다.



휴게소 옆 백록상 쪽으로 건너왔다.

그제야 한라산 둘레로 봉긋이 솟은 오름들 은빛 나신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오백장군 둘러 선 영실 골짜기도 선연하다.

배경으로 받쳐주는 하늘 시리도록 푸르러 눈밭 쏘다니면서 설화와 설경 담았으며 사진 찍는 가족 카메라도 대신 눌러줬다.
Oh happy day! Beautiful life~선율 무한 반복되며 감미롭게 귓가를 간지렀다.

가끔씩 조각보만 하게 푸른빛 천공 펼쳤다가도 눈바람에 홀연 날려가 버리고 산은 차츰 구름 떼에 잠식당해 간다.

북서쪽에서 빠르게 밀려오는 잿빛 구름에 장단 맞춰주는 심술스러운 바람소리.

눈발 점령하기 전 재빨리 눈꽃 몇 장을 더 담는다.

한라산이 하얗게 변하기만 하면 자석에 끌리는 쇠붙이인양 천백고지로 내닫곤 하는 나.

이것이야말로 떨치기 어려운 중독이다.

생각지도 않았던 서귀포살이, 무슨 공덕 있어 이런 축복 누리는가 싶어 그저 은총에 감복하기도 하면서.

눈소식 들렸다 하면 들뜨고 설레는 마음, 오늘은 이쯤에서 한라 산록과의 데이트를 마치기로 한다.

몇 시간을 아예 마스크 벗고 호흡량 최대치로 높여 청량한 설향 깊이깊이 마셨으니 이만하면 흡족하다.

그리하여 서슴지 않고 퇴각 결정, 미련 없이 물러나 흔쾌히 귀갓길에 올랐다.

등 떠밀어 대는, 금방이라도 펄펄 눈 내릴 듯 심난스러운 날씨 때문이기도 하였고.

허나 웬걸, 중문에 닿을 무렵 백록담 정상은 마법이 풀리기라도 했던가.

말쑥한 얼굴로 오연스레 서있었다.

거처에 돌아와서 건너다본 한라산은 언제 심통 부렸나 싶게 의젓하니 평화로웠다.


서귀포방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