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드 미션의 이끼

캘리포니아 카멜 미션

by 무량화

오래된 미션에 가면 해묵어 퀴퀴한 먼지 냄새와 풍우의 세월이 남긴 녹처럼 습습한 이끼를 만날 수 있다.


고색창연한 카멜 미션 역시 흙벽 낡아 모퉁이 무너지고 비 샌 얼룩이 마치 노병의 상처 흔적같이 남아있었다.


담황색 기와지붕은 녹두빛으로 변했고 석축은 추상화 프레임에 폭신 싸여 나름 근사했다.


다 이끼가 부린 조화였다.


사시장철 건조하고 해바른 마을에 살다 보니 지붕골이나 나무 밑동에 낀 이끼가 유독 생광스럽게 다가왔다.


외갓집 찰랑거리던 돌샘, 바가지로 물을 뜨면 돌에 붙어 하느작대던 이끼가 일제히 왈츠를 추었지.


안개 낀 대흥사에서 본 이끼는 부도밭에서, 석탑에서 푸른 생명을 꽃피우고 있었지.


후미진 산사 돌담 아래 깔린 새파란 우산이끼는 산토끼처럼 발 빠르게 영역을 넓혀나갔지.


뉴저지 밀밀한 숲 속 고목 무릎짬까지 더께진 이끼 깊고도 두터웠지.


지난겨울에 이어 다시 찾은 카멜 미션 후원에서

한꺼번에 이끼에 관한 기억들이 두서없이 풀려나왔다.


이끼를 세월의 녹으로 풀어쓴 문장이 아직껏 기억에 남겨진 어떤 분이 동시에 떠올랐다.


중세 건축을 접한 다음 "구라파 문화에는 역사의 먼지가 차곡차곡 앉아있다"라고 표현한 대목도 생각났다.


당시 연세 높은 분들은 유럽을 구라파라 표기했다.


한참 웃어른이신 것이, 내가 사십이 채 안 됐을 때 1920년 생이신 그분은 정년퇴직 후 법대 명예교수였다.


'목필'이라는 동인지는 부산에서 해마다 책을 묶었으니 80년대부터 십수 년 한 달에 한차례, 동인으로 자리를 함께한 분이다.


서울 올림픽이 열리던 88년 여름 첫 산문집을 낼 때 그분으로부터 과분한 발문을 받은 인연도 있는 어른이시다.


그분은 높이 쌓아 올린 학문의 탑 남겨두고 오래전 작고하셨다.


동아대 법대 학장, 대학원장을 역임하신 그분은 ‘목탄으로 그린 인생론’, ‘문학과 철학 사이’ 등 수필집을 낸 법철학자 현석 김병규 박사님이시다.


평소 들어주는 역할을 주로 하시는 그분이 느릿느릿한 어법으로 수만 권 서책이 함축된 해박한 논조를 펼칠 땐, 얄팍한 지식으로야 감히 한마디 보태거나 나설 수도 없었다.


연륜과 경륜을 갖추신 그분은 우리 모두의 멘토로 동인들 중심에 바위처럼 묵묵히 자리하고 계셨다.


오랜 기간 만난 분이지만 여전히 어렵던 어른, 무엇보다 진중하고 겸손한 인품으로 존경을 두루 받으셨다.


동인끼리 갖는 식사 자리에서도 가벼이 허튼 농 한마디 안 하시던 점잖은 모습 떠올리니 지금은 어언, 그때 그분보다 나이가 더 들었건만 여전 경조부박한 자신이 민망스레 돌아다 보인다.



그렇다, 타고난 성정도 성정이지만 품격은 오랜 기간 자신의 삶 가운데서 스스로 노력하여 만들어가는 거다.


주어진 하루를 여하히 살 것인가, 그리하여 먼 훗날 어떤 사람으로 기억될 것인가.


1700년대 중반, 두 번째 선교 전초기지로 세워진 카멜 미션에서 세월의 향기 흠향하며 거닐던 중이었다.


이끼 주제로 한 문장과 토씨 하나 소홀히 다루지 않던 노교수님이 홀연 떠올라 잠시 자기 성찰에 잠겨 들었다.


성숙한 품격은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향기로운 인품을 갖고자 한다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 걸까.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행동의 절제를 통한 신뢰가 쌓인 위에 어떤 상황에서도 예의와 존중을 다하는 태도가 품격을 결정짓는다.


언행이 일치하고, 겉과 속이 같은 정직한 삶을 살아야 할 것이며, 내면의 성품과 외적인 품위가 조화로울 때 인품이 훌륭하다고 한다.


미성숙한 사람이 감히 경계까지는 욕심내지 않겠다.


羞惡之心 義之端也 (수오지심 의지단야)라 하였다.


의(義)는 외부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수오지심을 확충하여야 실현 가능한 것.


부끄러움을 아니 그나마 다행이라 위안 삼으며 이끼 눅진 카멜 미션을 나섰다.



https://brunch.co.kr/@muryanghwa/136